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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묘 Oct 07. 2021

언어가 태어날 때(1)

도쿄의 장례업자 M

신오쿠보에서 가까운 오쿠보역 옆 이자카야 골목. 한국인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인들이 운영하는 가게가 많다.


내가 도쿄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개인 과외로 한국어를 배우고자 하는 일본인 학생을 한국인 강사와 연결해주는 사이트에 등록한 것이었다. 온라인에 오픈된 강사 프로필을 보고 학생이 한 사람을 선택하면 사이트를 운영하는 사무실에서는 해당 강사에게 학생의 성별과 나이, 수업 희망 요일이나 한국어 공부 목적, 레벨 등이 담긴 간단한 정보를 알려주고 수업 의사를 묻는다. 강사가 오케이를 하면 연락처를 서로에게 알려준다. 그리고 학생과 강사 둘이서 연락을 취해 오프라인에서 만난다. 대략 그런 시스템이었다. 국문과를 나와 10년 넘게 중고생들을 대상으로 국어와 논술을 가르쳤다는 따위의 내용을 자기소개에 입력했다. 그밖에 딱히 어필할 게 없었다. 사진까지 업로드해서 오백 몇 번의 엔트리 넘버를 달고 강사 리스트에 올라갔을 때는 약간 비장한 심정마저 들었다.  

  

수업료는 한 시간에 삼천 엔. 수업이 끝나면 그 자리에서 현금으로 지불. 간혹 한 시간 반이나 두 시간을 원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주 1회에 한 시간을 선호한다고 했다. 강사는 가입비라든지 따로 지불하는 비용이 없고, 학생은 수업료 이외에 매달 회비를 내게끔 되어 있었다. 그 회비가 사이트를 운영하는 사무실의 수입원이 되는 것 같았다. 장소는 학생과 강사 둘이 의논해서 정하면 되는데, 카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 교통비와 찻값은 강사 본인 부담. 삼천 엔 받아서 차 떼고 포 떼고 뭐 남겠나 싶기도 했지만, 푼돈이냐 아니냐를 따질 처지도 못 되었고, 학생 수가 늘어나면 꽤 쏠쏠해지겠거니 하는 착각도 좀 하고 있었다.


생각과는 달리 연락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2주 정도 지나자 기대감은 완전히 사라졌다. 다행히 그 2주가 지나면서부터는 1년간 연수를 받게 될 와세다 대학에서 실시하는 오리엔테이션 참석이라든지 입학 준비 등으로 바빴고, 5월부터는 신오쿠보에 있는 한국어 학원에 들어가게 되어 인터넷 사이트에 강사 등록을 했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지냈다. 그랬는데. 무려 해가 바뀐 1월 초에 학생을 소개한다는 메일이 한 통 날아들었다.


학생은 40대 중반의 남성 M. 한국어 학습 경험 전무. 직업은 장례업자. 직업 특성상 수업 도중에 일과 관련된 연락을 받으면 바로 자리를 떠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으므로 양해해줄 수 있는 강사를 원함. 희망 요일과 시간은 금요일 밤 9시 이후. 장소는 이케부쿠로를 중심으로 20분 이내라면 어디라도 가능.  


하지 않을 이유는 얼마든지 있었다. 평일에는 와세다에서 늦은 오후까지 수업을 들었고, 그나마 남는 시간은 전부 신오쿠보의 한국어 학원에서 쓰고 있었다. 연수라고 해도 일주일에 13과목을 듣고 그만큼의 과제와 테스트 등이 있었기에 매일이 강행군이었다. 심지어 토요일과 일요일은 오전 10시부터 저녁 6시까지 풀타임으로 근무를 하고 있었기에 금요일 밤 9시 이후 일정을 잡는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그렇게까지 해서 한 달에 만 이천 엔을 더 번들 큰 기쁨이 되지도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5월에는 귀국을 할 예정이었다. 실제 메일에도 “3개월 이내에 귀국 예정이 있는 분이라면 지원하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사무실측의 멘트가 적혀 있었다. 그럼에도. 하겠노라고 회신을 했다.


솔직히 말하면 애초에 한국어 학습 경험이 전혀 없는 40대 중반의 장례업자가 무슨 까닭이 있어 한국어를 배우기로 했는지 그게 너무 궁금했기 때문이다. 알고 나면 되게 시시한 이유일 수도 있겠지만. 그냥 알고 싶고, 한 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1월 11일, 21시, 이케부쿠로역 동쪽 출구 나가기 전에 있는 올빼미상 앞에서 뵙겠습니다." 사무실을 통해 연락처를 받은 뒤 내가 먼저 메일을 보내 인사를 했고, 두어 번의 메일을 통해 약속 장소를 정했다. 첫 수업은 일명 '체험 레슨'으로, 수업료는 받지 않는, 일종의 미팅 겸 시범 수업이었다. 물론 찻값도 교통비도 따로 나오는 건 없었고, 학생이 체험 레슨에서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걸로 끝인 셈이었다. 그래서 연결해주는 사무실에서는 "적어도 40분 이상 수업을 해라, 자기소개로만 끝내지 마라, 회비 내기 싫어서 사무실을 거치지 않고 수업을 잡으려는 사람은 거절해라" 하는 등의 주문 사항을 살뜰하게도 메일로 적어 보냈다.


먼저 올빼미상 앞에서 보자고 한 사람은 M상이었다. 이케부쿠로에서는 만남의 장소로 유명한 곳이었다. 첫인사야 그렇다 쳐도, 서로 전화번호를 알고 있으면서 우리가 통화를 한 적은 마지막까지 한 번도 없었다. 일본에서는 카카오톡만큼이나 보편화된 LINE 메시지조차도 주고받은 적이 없었다. 연락은 언제나 메일로 주고받았다. 딱 한 번, 부재중 전화는 있었다. 그가 '일' 때문에 40분 늦게 약속 장소에 나왔던 날. 그냥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걸려온 전화였다.


올빼미상 앞에 도착해서 내 인상착의를 알리는 메일을 보내려는 찰나 한 남자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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