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宮)
서울에서 태어나 50년 넘게 서울에서 살고 있다. 서울은 사람도 많고, 차도 많고, 빌딩도 많아서 사람 살기가 힘든 곳이지만 살다 보면 그럭저럭 살만하다. 산도 있고, 강도 있고, 궁궐도 있고, 놀이동산도 있고, 호텔도 있다.
참 오랜만에 와 본 창경궁
특히 나는 궁궐이 가까이 있는 동네에서 유년시절과 청년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궁(宮)에 대한 추억이 많다. 어릴 때는 창경궁(당시 창경원)으로 소풍을 갔고, 중고등학교 때는 사생대회를 할 때 경복궁으로 갔다. 연애 를 할 때도 가끔 궁에 갔고, 결혼을 하고 난 후에는 아이들과 궁궐 산책을 했다.
궁은 내게 편안하고 익숙한 곳이다. 조선왕족의 피가 몇 방울 섞여 있어서 그런가보다.
건물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고 오래 지속된다는 것은 가치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직업은 25년 동안 바뀌지 않았고, 나의 글쓰기는 35년 동안 계속되고 있고, 나의 친구들은 40년이 넘었고, 나의 아내는 함께 산지 17년이 되었다. 내 방 한쪽에 틀어 박혀 있는 나의 매킨토시 컴퓨터도 24년이 넘었다.
1년 중 궁이 가장 이쁠 때는 4말 5초가 아닐까 싶다.
궁(宮)은 수백 년을 같은 모습으로 변하지 않고 있으니 얼마나 듬직한지 모른다. 아마 앞으로 10년 20년 30년이 흘러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들이 요즘엔 무척 대단해 보인다. 초등학교의 교정도 변했고, 옛날에 살던 동네는 재개발이 되었고, 옛날에 알고 지내던 사람들도 많이 변했다.
나무가 이쁘면서 멋있다.
평생직장도 없고, 평생 직업도 없고, 평생 같이 살 사람도 없는 시대다. 바로바로 바뀌고, 헤어지고 대치되고 갈아치우는 시대다. 기다려주지 않는다. 유일하게 변함없이 기다려 주는 것이 궁(宮)이 아닌가 싶다. 오랜만에 궁에 왔지만 나무들의 두께만 굵어졌을 뿐 변한 게 없다.
그 시절 교회 오빠로 왔었던 창경궁. 지금 그 아이들은 어디에 있을까? 나처럼 결혼을 해서 아이 낳고 잘 살고 있을까? 아니면 혼자서 잘 살고 있을까? 궁금하고 그립다.
가끔은 궁궐을 가보기를 추천한다. 쇼핑도 좋고, 호텔도 좋고, 유럽여행도 좋지만 궁(宮)은 궁이 갖고 있는 큰 매력이 있다. 한강변에 돗자리를 깔아 놓고 맥주를 마시고, 캠핑장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또 다른 즐거움과 매력이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 궁(宮)을 천천히 산책을 하면서 거닐어 보면 아마 급(級)이 다른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왕이 놀던 그 자리, 왕이 걷던 그 자리, 그 공간을 상상하며 걷는 것이다. 생각도 왕처럼 해야 한다. 왕의 정원을 걸으며 불판에 고기 구워 먹을 생각만 가득 차 있으면 안 된다. 환경이 왕이면 정신도 왕이어야 한다. 우리가 안중근 의사 처럼될 순 없어도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가끔은 관심을 갖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