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같은 하루를 마치고 집에 왔는데 아내의 표정이 좋지 않다. 독립운동을 하러 나가는 투사의 모습처럼 장엄한 느낌도 있다. 집에 들어온 지 1시간이 넘었는데 말 한마디 없다. 싱크대에서 조용히 김치를 썰며 양파를 까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해 온다.
슬그머니 다가가 어디가 아프냐고, 무슨 일 있냐고 물어도 아무 대답이 없다. 더 이상 묻지 말고 자리를 피해야 한다. 조용히 작은 방으로 들어가 오늘 하루를 복기해보았다. 분명 출근할 때는 밝은 목소리로 배웅을 했다. 그리고 오늘은 전화통화를 하거나 메신저도 주고받은 적이 없다.
그렇다면 오늘 하루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혹은 예전 일이 갑자기 생각이 나서 기분이 나빠진 것일까? 가능성 있는 모든 상상력을 동원해 보았지만 뾰족이 잡히는 것이 없다. 일단 은폐, 엄폐 후 아내의 동태을 살피면서 잠복해 있어야 한다.
신혼 때처럼 과한 배려심으로 필요 이상의 관심을 보이거나 어설픈 위로를 하면 안 된다. 자칫 잘못하면 더 큰 화를 불러올 수도 있다. 면밀히 사태를 파악하고 잠시도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된다. 지나친 관심도 방관도 금물이다.
시간차를 두고 한 번씩 안부를 물으며 사태를 주시해야 한다. 기분이 울적한 경위를 물어보고 화를 내기 전에 얼른 시야에서 사라져야 한다. 틈틈이 아내의 동선을 살피며 설거지가 쌓여있는지, 양말 바구니에 양말이 제대로 들어가 있는지 체크하고 빠르게 조치를 해야 한다.
아내가 잠시 휴식하는 틈을 타서 우렁각시처럼 일을 처리해 놓아야 한다. 경솔하게 행동했다가 아내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경우 의도와는 다르게 험한 꼴을 당하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으니 각별히 조심하자. 항상 낮은 자세로 겸손하게 임해야 한다. 잊으면 안 되고 매뉴얼을 만들어서 반복 숙지해야 한다. 배려가 몸에 배어야 한다. 도와주고 핀잔을 듣는 최악의 상황을 이미 여러 번 경험하지 않았던가?
내일 아침까지 조용히 있을까 고민하던 중 그래도 한 지붕 아래서 사는 사람인데 무슨 일이 있는지 걱정이 되어 다시 말을 건네 보았다.
"내일 몇 시에 나가? 사람들 만나기로 한 장소는 정했어?"
아내는 내일 1박 2일로 몇 년 만에 지인들과 여행을 간다. 오랜만에 여행이라 나도 흔쾌히 응원하고 지지해주었다.
"당신 내일 새벽에 일찍 나 간데메 시간은 뭐하러 물어?"
아뿔싸, 예상은 했지만 막상 상황이 펼쳐지니 현타가 온다. 당황한 기색을 보이면 안 된다. 궁금증이 증폭했지만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 더 궁금해하면 안 된다. 더 알려고 해도 안된다.
이슬비가 내릴 때 처마 밑으로 들어가던가 우산을 사러가던가 신속하게 결정을 해야 한다.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하면 이미 옷은 젖을 수밖에 없다. 나도 참았어야 하는데 순간 감정대로 말을 해 버렸다.
"내가 놀러 나가는 것도 아니고, 아버지 기일이라 봉안당 가는 거잖아. 몇 시에 나가는지 물어도 못 보나? 당신 일찍 나가야 되면 내가 조금 늦게 나가려고 그래"
여전히 아내는 묵묵부답이다. 부부싸움에 대처하는 십계명중 제 삼계.
"원인을 모를 때는 섣불리 위로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아내가 입을 열 때까지 호들갑을 떨지 말고 진중하게 기다려라."
몇 초간의 짧은 정적이 흐른 후 나는 거실에서 이슬처럼 사라졌다. 다음날 아내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딸이 하루 동안 먹을 김밥을 잔뜩 만들어 놓고 여행을 갔다.
아내가 돌아올 때까지 편한 마음으로 주말을 보낼 수는 없을 것 같다. 결혼한 지 15년이 지났지만 우리 부부는 여전히 모르는 부분이 많다. 다른 부부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오래 같이 살아도 말하지 않는 것은 알 수가 없다. 같은 상황이라도 해석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명확하게 말로 표현해 주어야 한다.
부부라는 관계는 "평생을 맞추려고 하다가 결국 못 맞추고 생을 마감하는 퍼즐과 같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일견 공감되는 부분도 있다. 어쩌면 맞추려고 용쓰지 말고 안 맞으면 안 맞는 데로 흘러가는 데로 사는 것도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거워진 공기를 가볍게 만드는 키는 아내가 쥐고 있다. 나는 자숙하며 겸허한 마음으로 인고의 시간의 맞이 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