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TV에서 말기 암환자들의 추적하는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그 녀는 6개월 시한부 인생을 사는 엄마였다. 머리를 깎고 수술을 준비하는 와중에도 중학교에 입학하는 딸아이 교복을 다려줘야 한다며 살고 싶어 했다. 그 녀는 방송이 나간 후 3개월 만에 하늘나라로 가셨다.
부모들의 가족애는 주위에서도 종종 보게 된다. 회사 거래처 직원 중 한 분은 사업을 하시다 부도가 났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 보려고 중고 트럭을 사서 장사를 했는데 생활은 갈수록 어려웠졌다. 자괴감과 열등감, 극심한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극단적을 선택을 하려던 순간 집에 있는 초등학생 딸에게 전화가 온다.
"아빠, 어디야 오늘 일찍 들어와. 치킨같이 먹자"
그가 대답했다.
"아빠, 돈이 없는데 다음에 먹자"
그는 결심을 굳히고 핸들을 팔당대교로 돌리려는 순간 딸이 다시 말한다.
"아빠, 내가 저금통에 모아둔 돈 있잖아. 그걸로 사 먹으면 되지...."
이 말을 듣고 자살을 할 수 있는 아빠는 없다. 딸은 동전을 모아둔 돼지 저금통을 털어서 치킨을 사 먹으려고 했다. 치킨 한 마리도 사 먹을 여유가 없는 극한의 빈곤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을 공감할 수 없겠지만 비슷한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충분히 공감됐다.
"내가 죽으면 아내와 딸은 보험금으로 편안하게 살 수 있다"라는 생각으로 그는 생을 마감하려 했으나 딸의 전화 한 통으로 지금까지 살아 있다. 지금은 딸이 대학을 졸업해서 직장을 다니고 있다고 한다. 그는 얼마 전 작은 집도 하나 샀다고 했다.
독립운동가는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지만 가장들은 가족을 위해서 목슴을 바친다. 나 하나 죽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요즘도 생활고를 비관해서 어린아이들과 동반 자살하는 비정한 부모들도 있는데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다. 국가나 사회도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죽고 싶어서 죽는 사람은 없다. 삶은 이렇게 매정하고 비정하다. 무심하고 치열하고 덧없기도 하다.
사람의 목숨을 치킨 한 마리로 살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날 딸아이가 치킨이 먹고 싶지 않았다면 그는 지금 이 세상에 없다. 연애 때처럼 달달한 낭만은 없어도 목숨을 줘도 아깝지 않은 존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 그것이 부모고 가족이다. 내가 나로 살지 못해도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후회하지 않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진짜 사랑이다. 세상의 모든 사랑을 통틀어 최상급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나데로 즐기면서 아빠로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이상적이 얘기다.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 덜 중요한 것을 포기하는 것이고, 덜 중요한 것을 나중에 하는 것이다. 그 포기에 대해서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은 없다. 그리고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고 생각한다. 삶의 완성은 나를 위한 삶을 살다가 남을 위한 삶을 살면서 생을 마감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나만 위해서 살다가 가는 삶은 즐겁긴 하겠지만 멋있지는 않다. 나는 멋있게 살다가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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