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서재]
햄토리가 살 것 같은 작은 원룸에 몸을 욱여넣고 살고 있다. 가전과 가구에 대한 욕심은 일찌감치 버렸음에도 책 욕심은 버리지 못했다. 한 권 한 권 사 모은 책이 발로 차일 지경에 이르러, 작은 책꽂이를 샀다. 기껏해야 20권 남짓의 책을 꽂을 수 있는 내 서재다.
작다기보다 좁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그 서재에는, 내가 정말 아끼는 책들만 꽂혀 있다. 이것저것 다 꽂아 둘 여력이 없어 군더더기 없이 내 취향을 듬뿍 반영한 녀석들만 모았다. 고로 이 서재는 아주 편향되고 편협할지도 모른다.
독방 생활은 좀 어떠신가요. 날이 많이 찬데 난방은 잘 되는지 걱정입니다. 음식은 어떤가요. 입에 좀 맞으세요? 전에 드시던 복지리 같은 게 생각나지는 않으시는지 궁금합니다. 아무리 구치소라지만 2017년도이니 설거지할 때 온수 정도는 나오겠지요?
음.. 제가 호칭을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검사님, 의원님, 비서실장님, 어르신, 기춘이형, 기춘옹, 대원군, 선생님. 음.. 무난하게 기춘이형이라고 부르는 게 좋겠죠?
기춘이형. 구속되시던 그날 기억이 저는 아직도 생생해요. 정말로 구속되실지 몰랐거든요. 왜 바로 직전에 이재용 씨도 구속이 안 됐었잖아요. 바로 다음 날 형이 구속됐다는 속보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바로 영상을 찾아봤더니, 수갑을 찬 양 어깨가 잔뜩 올라가 있더라고요. '많이 긴장하고 계시는구나' 했어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구속시키셨지만, 본인이 구속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을 테니 기분이 남다르셨겠죠.
청문회에서 바락바락 대드는 새파란 의원의 질문에도 유연하게, 고고하게, 우아하게 답하는 모습을 본 게 엊그제 같은데, 구속되신 지 어느덧 보름이 더 지났습니다. 어디서든 어떤 직책이든 잘 적응하셨으니 그 생활도 금방 적응하셨으리라 믿고 있어요. 이제 슬슬 여유도 생기셨죠? 듣기로는 요즘 감옥은 좋아져서 책도 막 대출해서 읽을 수 있다고 하던데, 언제 시간이 좀 나시거든 읽어보시라고 재밌는 소설 한 권 권해드려요. 김려령 작가의 「우아한 거짓말」이에요.
평생을 조국과 민족에 헌신한 형, 이런 소설 읽어볼 시간이 없으셨죠? 형은 모르셨겠지만 김려령 작가는 꽤나 이름을 날린 작가에요. 왜, 완득이라고 새누리당 이자스민 의원 나왔던 영화 있잖아요. 그거 원작도 김려령 작가가 쓴 소설이거든요. 저 개인적으로는 「완득이」 보다 「우아한 거짓말」이 훨씬 재밌었어요. 어렵지 않고 술술 읽히니 꼭 읽어보세요. 적군 리스트 같은 거 보단 훨 재미날 거에요.
내일을 준비하던 천지가, 오늘 죽었다.
소설의 첫 문장이에요. 이야기는 천지라는 중학생이 자살하면서 시작해요. 언뜻 보기에 전혀 죽을 이유가 없었던, 집 가구를 리폼하겠다는 '내일'을 계획하던 천지가 죽은 것이죠. 유서 한 장 남기지 않은 동생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언니 만지가 동생의 흔적을 추적하는 과정이 이야기의 큰 줄기에요(동생이 천지, 언니가 만지, 참 쉽죠?).
만지는 주변을 수소문해 천지가 은근히 따돌림당한 은따였다는 걸 알게 되죠. 그걸 주도한 것이 같은 반 친구인 '화연'이라는 것도요. 화연이 바로 이 소설의 문제적 인물이에요. 화연은 교묘하게, 때로는 우아하게 보일 정도로 은밀하게 천지를 따돌렸지요.
충돌에 익숙하지 않아 그냥 참아버리는 아이. 이런 아이 하나쯤 왕따로 만드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이런 식이에요. 화연이의 생일날 친한 친구들을 초대해 생일파티를 했어요. 그런데 다른 친구들에게 쓴 초대장에는 2시라고 써놓고, 천지에게는 3시라고 쓴 초대장을 주는 거에요. 파티가 끝나갈 즈음, 음식은 대부분 해치웠고 남은 것 마저도 차갑게 식을 즈음에 도착한 천지는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못하죠. 의도적으로, 과도할 정도로 미안하다며 사과하는 화연이 앞에서 천지는 따질 수 없어요. 지금 화를 내면 왕따를 인정하는 꼴이 되니까요.
또 다른 사건을 볼까요. 화연이는 천지 아버지가 자살로 돌아가셨다고 친구들에게 소문을 퍼트려요. 물론 거짓말이죠. 천지 아버지는 어릴 적 사고로 돌아가셨거든요. 그럼에도 거짓 소문은 오래오래 떠돌아요. 누구보다 기춘형이 잘 알다시피 거짓은 힘이 세니까요. 어쩐지, 천지는 조금 음침한 구석이 있었다느니, 이상하다느니 하는 감상까지 덧붙으면 걷잡을 수 없는 프레임이 완성되는 거죠.
발 빠른 화연이의 사과. 화연이의 말이 거짓으로 밝혀져도 상처는 내가 받았습니다. 거짓 소문은 살을 보태가면서 빠르게 퍼졌습니다. 하지만 정정된 진실은 더디게 퍼지다가 어느 순간 스르륵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런 화연이의 거짓말로 천지는 은따가 되어버리고 말죠. 물론 천지가 아무 저항도 하지 않은 건 아니에요. 천지는 노력하지 않는 척하며 성적으로 화연이를 앞지르고, 화연이의 거짓을 바로 정정할 수 있도록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죠. 우울증 증상을 찾아 정반대로 행동하기도 해요. 그러면 친구들이 생길지도 모르니까요. 가족들에게 친구 사귀는 게 어렵다는 이야기도 하죠. 가족들이 무성의하게 넘겨 더 큰 좌절감을 맛보긴 하지만요.
형처럼 꼼꼼한 사람이라면 이쯤에서 이른 질문이 떠오를 거에요. '대체 왜 화연이는 천지를 따돌리려 하는 거지?'
처음부터 둘의 사이가 나빴던 건 아니에요. 천지가 전학 온 후 처음 대화를 나눴던 게 화연이었으니까요. 처음에는 장난으로 시작했어요. 화연이의 눈에 천지는 지나치게 바르고 꼼꼼했으니까요.
화연인 천지와의 기억이 유쾌하지 않았다. 천지는 남 주자니 싫고 가지자니 더 싫은, 그런 친구였다.
초등학생 때는 그런 천지를 은근히 따돌리는 것이 어렵지 않았어요. 그런데 중학생이 되자 천지도, 주변 친구들의 반응도 달라지게 되었죠. 그런 유치한 장난에 말려들기에는 너무 커버린 것이겠지요.
말 한마디에 징징 울어대던 때가 아직도 선한데 언젠가부터 찰나처럼 날카롭게 획 바라볼 때는, 정말이지 끔찍했다. (중략) 천지에게 말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을 때, 그만두어야 했다.
유치한 장난이 먹혀들지 않자, 화연이는 점점 초조해졌어요. 자신이 컨트롤할 수 없는 아이가 돼버린 천지가 두려웠겠죠. 천지를 따돌리는 방법을 더욱 은밀하고 교묘해졌어요. 사실을 조작하고 왜곡하고 날조하면서요. 그렇게 화연이의 따돌림은 점차 심해지고, 견디다 못한 천지가 붉은 털실을 길게 따 목을 매고 말죠.
인과응보라고 해야 할까요. 따돌림당하면 천지가 죽자, 화연 자신이 따돌림의 대상이 돼요. 천지 따돌리는 데 앞장섰던 자신에게 화살이 쏟아지는 것이죠. 언제나 천지를 이용해서 거짓으로 꾸며낸 자극적인 천지 이야기로 친구들을 대했던 화연이 곁에 남은 친구는 없었어요. 화연이는, 천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아이인 것이죠.
화연이가 천지를 그렇게 못살게 굴었던 건 지독하게 외로웠기 때문일지도 몰라요. 다른 친구들은 이미 친한 친구가 있고, 중국집을 하는 엄마와 아빠는 항상 바쁘니까요. 물론, 화연이의 행동을 두둔하려는 건 아니에요. 비록 그 행동이 누구나 느끼는 지극히 정상적인 감정인 외로움에서 비롯됐다 하더라도 조작과 날조, 거짓 선동이라는 옳지 않은 방법으로 해결하려 했으니까요. 형도 잘 알다시피 선한 의도가 면죄부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조국과 민족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뜻이 조국과 민족을 망하게 만들 수도 있는 것처럼요.
어때요, 파국으로 치닫은 이야기 끝에 화연이는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시간이 나거든 꼭 읽어보세요. 형이 감방에서 얼마나 오래 지내게 될지 모르겠지만, '우아한 거짓말'이 낳은 파국을 아프게 그려낸 이 소설이 형의 지루한 교정 생활에 도움이 되기를 바래요.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