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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밈 Sep 11. 2019

회식의 민낯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을 알게 된다

조촐한 회식자리가 열렸다. 음식점이 줄지어 늘어선 어느 골목가, 우리는 어느 횟집으로 들어갔다. 참석한 사람은 50대 후반의 남자 팀장님, 30대 후반의 남자 팀원 두 명 그리고 나. 4명이서 오붓하게 방에 있는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팀장님은 권위의식이 없으셔서 생각보다 분위기는 편하였다. 하지만 편한 것과 즐거운 것은 또 다른 법. 팀장님의 "Latte is Horse" 공격이 연이어 이어지면서 대화는 점점 재미없어졌다. '나 때는 이랬고 저랬고~' 반복되는 의미 없는 이야기에 '그래서 뭣이 중헌디?!' 하고 외치고 싶었다. 미래를 말하지 않고 과거만 말하는 사람들에게서는 반짝거림과 생기를 기대할 수 없다. 그렇게 한참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고, 갑자기 팀장님께서 말씀하셨다.


"아, 미니밈 너, 우리 같이 교육 갔었을 때 있잖아. 그때, OO 회사 공부하고 있던데? 그때 내가 네 책 봤어."


무려 1년 전 이야기다. 심지어 그때 책상 밑에 고이 숨겨 둔 내 NCS 필기 책을, 나와 자리도 멀었던 팀장님이 굳이 내 자리로 찾아와서 봤다는 이야기다. 내 책상을 뒤져보셨나?! 순간, 소름이 돋고 이 팀장님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 이야기는 작년에 한 번 말씀하셨는데 굳이 다른 팀원들 같이 있는 곳에서 또다시 꺼내시는 이유는 무엇인지. 단순히 대화 공백을 메우기 위한 것이라면 최악의 주제를 고르셨다.


"어, 미니밈씨. 다른 데 준비하고 계세요?"


0.01초 사이 거짓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였다. 그러다 그냥 솔직하게 말해버렸다. '어차피 애정도 없는 조직인데, 알 게 뭐야!' 하는 생각이었다.


"아~ 네 뭐. 저는 여기 처음 들어오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직 공부하고 있는데 잘 안되네요. 하하."


팀장님께서는 사기업과 비교해서 공무원 어떤 점이 좋은지 또 지방직과 비교했을 때도 이 직렬이 어떻게 더 좋은지 구구절절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사기업이나 시청 등 다른 곳에서 일하다가 이 쪽으로 이직한 다른 직원들까지 거론하면서.


"우리는 보기 싫은 사람도 2~3년만 보면 되지~ 거 얼마나 좋아~ 그리고 여자들한테는 공무원이 진짜 좋지~ 아 OO 씨는 서울에서 ㅁㅁ회사에 다니다가 여기 왔는데 너무 만족한다고 하던데?"


"아~ 네 ~ 진짜요?"


영혼 없이 맞장구를 쳤지만 사람마다 다 똑같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남들이 좋다 하는 것도 진짜 나에게 좋아야 좋은 거지, 그것이 나에게 극심한 알레르기를 발생시킨다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피하는 게 상책이다. 그래도 좋다는 점은 좋은 거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은 점도 있긴 하지.


그런데 팀장님의 그다음 말 한마디에 이직에 대한 동기부여가 갑자기 확확 불타올랐다.


"아, 그런데 내 친구가 은행에서 퇴직했는데 연봉이 1억 3~4천 되더라고~ 내가 여기서 일한 지 30년은 다 돼가는데 연봉이 6천밖에 안되는데~"


에? 뭐라고요?! 30년 일해서 연봉이 6천만 원이시라고요? 팀장님 말씀에 어느 정도 과장과 엄살이 붙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보통 회사에 비해서는 연봉이 몇 천만 원이나 차이 나는 건 분명했다. 누군가는 대기업에서 몇 년 만에 벌 돈을 누군가는 수십 년을 일해야만 벌 수 있다니.


공무원이 돈 대신 시간적 자유를 비교적 더 누릴 수 있다고는 하지만 자본주의 시대에 이 연봉 차이를 감수하고 굳이 여기 다녀야 하나라는 회의감이 들었다. 그것도 일에 대해서 전혀 보람과 만족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없었다. 저렇게 30년 이상 일하고 싶지 않았다.






조촐한 회식자리는 노래방까지 가서 2시간 동안 분위기를 띄우고 나서야 끝이 났다. 술도 많이 마시지 않았고 노래방가서도 부르고 싶은 노래만 실컷 부르다 와서 딱히 불만은 없다. 하지만 회식이 끝나고 난 후 마음은 무거웠다. 그동안 자리했던 돌멩이가 돌덩이가 되어 나를 숨 막히게 누르는 느낌이었다.


오늘 팀장님의 말씀을 듣고서 ‘아, 내가 본받을만한 사람이구나~ 정말 존경스러운 분이구나~ 아 나도 여기서 열심히 일해서 승진해야지~’ 하는 생각이 눈곱만큼도 전혀 들지 않았다. 그저 연봉이 적다고 툴툴거리고 그 옛날 국가기관의 권력이 높았던 시절을 그리워하기만 하는, 꿈도 희망도 다 저물어버린 어느 나이 든 아저씨만 눈에 보였다.


그래, 여긴 아니다. 마음을 짓누르는 이 돌덩이는 내가 퇴사해야만 없어지려나. 이 일에 대한 의욕은 사라지고 이직에 대한 동기부여만 잔뜩 받게 된 회식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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