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니밈 Aug 20. 2022

26. 적나라한 임신 고백

8개월의 입덧 지옥이 열리다


상견례 후 결혼 준비를 하던 중, 아기는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임신 계획을 하고 아기를 손꼽아 기다리다 맞이하였으면 더할 나위 없이 기뻤겠지만, 임신테스트기의 선명한 빨간색 두 줄을 본 순간 당혹감이 앞섰다.


아, 이 일을 어떡하지? 잘 다니고 있던 직장 문제부터 시작해서 양가 부모님에게 어떻게 알려야 할지, 앞으로의 결혼 준비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든 것이 다 막막해졌다. 결혼 날짜까지 잡은 상태였지만 결혼식을 올리기 전이니 말 그대로 '속도위반' 사고 친 것이 아닌가?! 그 보다 가장 큰 문제는 내 몸이 180º 변해버린 것이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으니 다른 문제들을 온전히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그 때문에 남편이 신혼집 인테리어며 혼수며 모든 것을 혼자 해내느라 엄청 고생하였다. 지금이라면 나도 적극적으로 알아보았을 테지만, 그때는 휴대폰을 들고 가십거리조차 보기 힘들어서 자취방 한편에 있는 침대에 웅크리고 누워있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임신 초기, 처음 느낀 증상은 쏟아지는 졸음이었다. 임신 사실을 몰랐을 때,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데 갑자기 졸음이 엄청나게 쏟아졌다. 잠도 푹 잔 편이었는데 눈이 계속 감기고, 밤새고 아침을 맞은 것처럼 졸음이 몰려왔다. 그땐 너무 나른하고 비몽사몽이어서 몸이 어디 좋지 않은 줄 알고 급히 조퇴까지 하고 집으로 갔다. 나중에야 임신 사실을 알고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졸음도 한 증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 그 유명한 '입덧'이 찾아왔다. 입덧은 임신 후기까지 계속 이어졌다. 남들은 임신 초기에 잠깐 하고 끝난다던데 나는 만삭인 몸으로 변기를 붙잡고 위가 튀어나올 정도로 헛구역질을 해댔으니 정말 지옥 같았다. 검은 비닐봉지는 밖에 나갈 때 필수품이 되어버렸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잘 먹는 편이었는데 식욕조차 사라졌고 먹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특히, 튀긴 음식은 전혀 먹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나 잘 먹던 치킨, 전, 튀김 등 기름진 음식은 쳐다도 보지 못했다. 평소에 잘 먹던 일반 음식들도 예전처럼 먹지 못하게 되고, 아예 차가운 냉면이나 아예 뜨거운 한우국밥이 그나마 잘 먹혔다. 직장에 출근할 때마다 점심 메뉴 고르는 것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 동료들이 날 배려해주어서 항상 내가 먹을 수 있는 음식 위주로 메뉴를 선택하였는데 그것이 한두 개로 한정적이다 보니, 괜히 나 때문에 동료들이 즐거운 점심 식사 시간을 제대로 못 누리는 것 같아서 미안하였다. 그래서 나중엔 혼자 도시락을 싸와서 먹곤 했었다. 단순히 음식을 가리기만 했으면 좋았으련만, 나는 '침덧', '토덧', '체덧', '먹덧' 각종 입덧 증상을 다 가지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공복이면 '꾸에엑'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며 토를 했고 온 몸의 피가 머리로 쏠려 얼굴이 빨개지고 눈물, 콧물이 쏟아졌다. 조용한 사무실에 앉아서 일을 하다가도 위가 비어있으면, 바로 구역질이 올라와서 화장실로 냅다 달려갔다. 회사 눈치고 뭐고 볼 새도 없이 힘들어서 집에 가고 싶었다. 또 업무 특성상 출장이 잦았는데, 출장지에 가서도 화장실을 들락날락거리며 '우엑' 토를 하였고, 팀장님과 선배 직원 다 같이 점심을 먹을 때도 차마 한 숟가락 뜨기가 힘들었다.


나는 임신을 한 상태여서 날 것인 '회'를 못 먹었는데 팀장님의 선택으로 어쩔 수 없이 횟집에 간 적이 있다. 거기서 나는 알밥을 시켰는데 겨우 한 숟가락 떠먹고 더 이상 먹지 못하였다. 남자인 팀장님과 선배는 '그래도 먹어야 힘내지'하고 어서 먹으라고 성화셨지만, 입덧을 겪어 보지 못한 자 말도 말라. 그토록 잘 먹던 내가 도저히 한 입도 못 먹게 되다니. 이건 억지로 먹는다고 되는 게 아니라 아예 먹을 수가 없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느낌이었다. 먹으면 바로 토할 것 같은, 뇌에서 '절대 먹지 마!' 하고 지시하는 느낌이었다. 심지어 팀장님께서는 소주 한 잔을 나에게 권유하셨다. 임신했을 때 마시면 아기가 나중에 술을 잘 마실 거라나 뭐라나. 자기 와이프, 딸에게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 궁금하였다. 밥 숟가락 하나도 뜨지 못하는 나에게 그런 저질 농담이라니.


토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지만 또 하나 날 괴롭혔던 건 침덧이었다. 살면서 처음 들어본 단어, '침덧'. 민원 안내 창구 당번이어서 화장실도 못 가고 앉아있어야 하는 날이면, 입에 침이 한가득 고이고 아무리 침을 삼켜도 뱉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침이 나왔다. 민원 창구 당번 시간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가 화장실로 달려가 입에 고인 침을 한가득 뱉곤 했다.


그리고 임신 후기에는 토를 너무 심하게 하다 보니 얼굴에 실핏줄이 터져 온 얼굴에 빨간 점들이 생겨있었다. 거울을 보면 얼굴이 빨간 좀비가 서 있는 것 같았다. 결국, 지옥 같은 '입덧'으로 육아휴직을 앞당겨 써야만 했고 집에 있는 와중에도 토를 하느라 너무 괴로웠다. 또한 역류성 식도염까지 생겨 밤에 속이 쓰려 잠을 거의 자지 못한 건 슬프게도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임신 초기에는 입덧 때문에 잘 먹지 못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무기력증'이 찾아왔다.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이 다 빠져버린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서 있으면 쓰러질 것 같아서 지하철역이나 버스 정류장에서는 항상 의자에 앉아있었고 의자가 없으면 주변 사람 신경 쓸 틈도 없이 쪼그려 앉아서 헉헉 거리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출장이 잦았던 업무 특성상 팀에 피해를 끼칠까 봐 전전긍긍하였다. 팀장님과 선배는 또 하필 흡연자셨고 출장 가는 길에 담배 한 대라도 피시게 되면, 나는 서있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혼자 저만치 떨어진 구석에서 쪼그려 앉아 숨을 헐떡이곤 했다.


간혹 출장지가 주차가 어렵거나 비교적 거리가 가까우면 지하철을 타고 갈 때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앉는 자리를 찾는 것이 고역이었다. 분홍색으로 칠해진 임산부 배려석은 꼭 누군가가 앉아있었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임산부가 아닌 사람이 앉아있었다. 임신 초기는 유산 위험이 가장 크고 구토, 무기력증 등으로 체력이 급감한 상태이지만 배가 하나도 나오지 않을 때라 임신 티가 안 나서, 불쑥 '내가 임산부요!'하고 임산부석에 앉아있는 사람에게 다가가 비켜달라고 하기란 쉽지 않았다.


이렇듯 체력이 바닥나버린 상태에서 가족, 남편과 같이 있을 때에도 무기력하게 침대에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다. 입덧 때문에 잘 먹지도 못하고 먹어도 속이 좋지 않으면 토를 해버리니 몸에 에너지를 공급할 수가 없었다. 가만히 있어도 힘들어서 서러운데 나를 지켜보는 이들은 "왜 그렇게 무기력하게 있어?", "임신을 무슨 병처럼 앓고 있네."라며 핀잔을 주었다. 가뜩이나 예민해진 나는 마음에 상처를 받곤 했다. 내가 이렇게 누워있고 싶어서 누워있는 게 아닌데. 사람들이 뱃속의 아기를 생각하면 잘 먹어야 한다고 툭 던지는 말도 곱게 들리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임신 초기의 아기는 엄마 뱃속의 난황에서 에너지를 얻기 때문에 괜찮다고, 내가 먼저 죽겠다고 날카롭게 쏘아붙이곤 했다.


하루에 수십 번씩 토하다 보면, '아기는 축복이다.' '뱃속의 아기를 생각해서 태교에 힘써라', '아기를 위해 골고루 잘 먹어라'같은 온갖 주변의 말들이 제대로 귀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오히려 '나'라는 존재도 무엇보다 소중한데, '태아'신경 쓰는 말들에 반감이 생기고 뱃속의 아기에게도 애정이 생기지 않았다. 길 가다가도 푹푹 주저앉고 쓰고 있는 마스크에다가도 토를 하는 상황에서, 뱃속의 태아보다 일단 내가 먼저 살고 봐야겠다는 생각이 더 간절했다. '이런 내가 이상한 건가?' 하는 의문도 들고 태아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매일매일 고통의 시간 속에서 그런 고민조차 사치였다.


배에 보기 싫은 임신선이 생긴다거나 겨드랑이가 갈색으로 착색된다거나 하는 변화도 생겼지만 그런 단순한 몸의 변화는 보기에만 이상할 뿐,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진 않았다.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입덧'지옥은 정말 임신이 상상도 못 할 만큼 힘들고 괴로운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출산'만 고통스럽고 힘든 것이 아니라 10개월의 '임신'이 더욱 만만치 않고 고달픈 여정이었다.




임신 중기에는 음식을 먹었다 하면 갈비뼈 쪽에 통증이 느껴졌다. 배는 불러오고 위가 압박되다 보니 갈비뼈가 눌려서 그런 것 같았다. 숨도 쉬기 힘들 정도로 오른쪽 갈비뼈 쪽이 꽉 조이는 느낌이 들고 욱신거리고 아팠다. 정말 갈비뼈에 금이 간 건 아닌지 의심될 정도였다. 임신 중이라 X-ray를 찍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혼자 침대에 옆으로 누어 조용히 아파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갑자기 종아리, 허벅지, 팔 등 온몸이 간지러워지는 임신 소양증도 찾아왔다. 어떻게 몸이 이렇게 간지러워질 수가 있지? 두드러기가 난 것처럼 붉게 나기도 하여 산부인과에서 피부과 로션을 처방받아 오기도 했다. 또 남에게는 말 못할 밑빠짐 통증도 생전 처음 겪어보는 고통이었다. 이쯤 되니 임신을 하면 겪을 수 있는 모든 증상들을 겪고 있었다. 마치 걸어 다니는 임신 증상 백과사전이라도 된 것처럼.


임신 후기에는 당연히 배가 남산만 하게 불러와있으니 호흡도 어렵고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찼다. 배 안에 양수가 가득 차 있고 3킬로그램이 넘는 아기가 들어있으니 얼마나 묵직할까. 특히 잘 때는, 무거운 배 때문에 똑바로 누워서는 잘 수가 없었고 항상 왼쪽 옆으로 돌아누워 자야 했다. 방광이 압박되어 새벽에는 꼭 한 번씩 화장실에 가서 소변을 눠야 했고 잠을 편하게 못 자서 불면증에 시달렸다.


임신하여 집에만 있으니 쉬어도 쉬는 게 아니었다. 공복이 느껴지면 바로 구역질을 해대니 스스로 내 밥 하나 차려먹는 것도 힘들었다. 그런 몸 상태로 집안일을 하고 육아용품을 찾아보고 구입하고 아기 손수건과 옷을 빨래하고 남편 밥도 차려줘야 하니, 차라리 임신 안 하고 멀쩡한 몸으로 출근해서 일하는 게 훨씬 낫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어느 날, 떡볶이가 먹고 싶어서 남편과 함께 차를 타고 떡볶이를 먹으러 가는 길. 차 안에서도 숨을 헉헉 대고 토를 할 것 같아서 호흡을 길게 들이마시고 반복했다. 마침내 떡볶이 집 근처에 도착했는데 차 문을 열자마자 바로 길바닥에 구토를 해버렸다. 이렇게 바람 한 번 쐬러 외출하는 것도 어려웠다.


물론 임신했어도 이전과 다름없이 멀쩡히 생활하는 사람들도 많다. 혹은 치질, 자궁 혹 등 나보다 더한 고통을 겪은 임산부들도 많을 것이다. 어쨌든 임신 기간 동안 책에 적혀 있는 거의 모든 증상들을 겪으며 임신이 정말 힘들다는 것을 몸소 느꼈고, 이 세상 모든 엄마들이 존경스러워졌다.


다들, 이 힘듦을 '아기'라는 작고 소중한 존재를 위해서 조용히 버티고 버텼구나 싶었다. 


그리고 가장 놀라웠던 건 출산 후 임신의 기억이 급속도로 미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갓 태어난 아기를 품에 꼭 안고 있으니 입덧이 고통스러워 힘들기만 했던 모든 임신의 순간들이, 꼬물거리는 태아를 온전히 내 배로 느낄 수 있었던 아름답고 고귀한 시간들로 느껴졌다. 이 세상에서 '나 자신'이 가장 중요했었는데, 이 작은 아기는 내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신기했다.


그래서 더욱 기록으로 남겨두려고 한다. 적나라한 임신의 순간들이 더 미화되기 전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