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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하연 Mar 13. 2024

70세 할머니가 영미 시를 배우는 이유

       

사랑은 낡아지지 않는다.



요즘 영미 시를 배우며 느낀 점이다. 동네의 청소년문화센터에 영미 시 산책이라는 어른 대상의 수업이 있어서 신청했다. 처음 접하는 영미 시들을 낯설지만 친숙했다. 1800-1900년대의 시임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인 사랑의 감정이 생생히 전해졌다. 어제, 옆집 사람이 쓴 시라고 해도 믿을 만큼 싱싱한 감정들이 놓여 있었다.       


 <the voice>는

토머스 하디(1840- 1928)가 죽은 첫 번째 부인을 회상하며 쓴 시다.    


Woman much missed, how you call to me, call to me,

Saying that now you are not as you were

When you had changed from the one who was all to me,

But as at first, when our day was fair.     


Can it be you that I hear? Let me view you, then,

Standing as when I drew near to the town

Where you would wait for me: yes, as I knew you then,

Even to the original air-blue gown!     


Or is it only the breeze, in its listlessness

Travelling across the wet mead to me here,

You being ever dissolved to wan wistlessness,

Heard no more again far or near?     


Thus I; faltering forward,

Leaves around me falling,

Wind oozing thin through the thorn from norward,

And the woman calling.     


시를 읽고 사람들은 저마다 감상을 이야기했다.

“두 번째 부인을 두고 첫 번째 부인을 향한 이런 절절한 시를 쓰다니….”

“두 번째 부인과 살다 보니, 첫 번째 부인이 더 그리웠던 건 아닐까요?”

“처음의 만남의 순간을 그리워하네요. 첫사랑이었을까?”

“남자는 첫사랑을 잊지 못하고, 여자는 잘해 준 사랑을 잊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있죠.”

“있을 때, 잘해주지. 떠나고 이런 시를 지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첫 부인이 살아 있을 때, 이런 마음을 전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죽은 부인은 이 절절한 마음을 알지 못한다.

문득 이 시를 이야기 하다가 몇 년 전, 내가 쓴 시가 떠올랐다. 남편을 향한 시다.




<초록은 그>   - 고하연     


풍경이 팝콘처럼 튀어 오르는 5월

버스의 창가 쪽 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본다


버스가 움직이면    

초록이 지고

나무들이 사리랑 사리랑 손을 흔든다     


때로는 앙상하게

때로는 풍성하게  

    

때때로 큰 가지로

때때로 작은 가지로     

 

언젠가 은은하고

언젠가 진했던 향기     


늘 있었지만

알아차리지 못했던 그가


창 밖으로 스친다

  

      

/

시 창작 수업을 듣고 쓰기 시작한 초반의 시였다. 여름날 광역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 길에 보이는 창밖의 풍경을 보고 쓴 시였다. 남편이 영감이 되어 쓴 시라고 하니 그는 무척 좋아했다. 연둣빛 새순이 보이기 시작하면 그는 <초록은 그>라는 말을 자주 반복했다. 시 한 편 썼을 뿐인데, 그는 매해 이 시를 떠올렸다.

그 모습을 보며 토머스 하디처럼 부인이 죽은 뒤 쓰는 것보다 살아 있을 때 쓰는 것이 더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일화를 이야기하니, 선생님이 비슷한 스토리가 있다며 입을 열었다.     


“전에 이 수업을 들은 70이 넘은 어르신이 있었어요. 그 시대에 이화여대 의상학과를 다녔는데, 지금의 남편을 만나서 대학을 그만두셨대요.”

“맞아요. 그때는 여자가 결혼하면 학업을 그만 두었어요.”

옆에 있던 비슷한 또래의 어르신이 덧붙여 설명했다.

“남편은 한양대 공대를 나왔는데, 그쪽에 뜻이 있다기보다는 아버님 공장을 이어받느라고 선택했대요. 남편이 환갑에 할머니의 초상화도 그려주고, 문학도 좋아해서 시, 소설을 자주 읽었대요. 지금은 사별하셔서 혼자되신 지 좀 되었는데, 그립다고. 남편이 좋아하던 시, 나도 배워볼까 하고 여기에 오셨더라고요.”   


 

선생님께 그분이 영미 시를 배우러 오는 이유를 듣는데, 토머스 하디의 시보다 더 큰 울림을 주었다. 우리는 같은 곳에 시를 배우러 오지만, 저마다 다른 마음을 품고 온다. 나는 시를 좋아해서 과거의 시는 어떻게 쓰였는지 궁금했다. 어르신은 매주, 죽은 남편을 만나러 이곳에 온다. 남편이 좋아하던 시를 배우면 남편을 만나는 기분이 드는 것일까?

    

할머니의 남편이 생전에 그려준 그림 한 장.

내가 쓴 시 하나.


어르신의 얼굴을 본 적은 없지만 우리 각자에게 잊지 못할 그림과 시가 하나씩 있다는 것만으로도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할머니의 초상화는 미술관이 아닌, 집의 거실에 걸려 있다.

내가 쓴 시는 작은 핸드폰 안에 있다.


둘 다 고전이 될만한 작품은 아닐지 몰라도, 한 사람에게만은 잊지 못할 명작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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