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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하연 Sep 25. 2022

여행도 영화처럼 제목이 필요해

제목수집




여행에도 제목이 필요했다.



처음부터 제목을 생각한 건 아니었다. 몇 십년 동안의 여행은 여행 후, 메모를 하고, 사진으로 기록한 것이 다였다. 그렇게 기억 속 서랍에 분류되지 못한 채 즐거운 추억으로만 증발되었다. 다시 회상하려고 해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데 오사카로 여행을 다녀오고, 문득 사진과 글을 모아 한 권의 책을 만들고 싶었다. 소장용 책을 만드려고 하니, 표지에 들어갈 제목이 필요했다. 고민하다가 떠오른 제목은‘54캬’였다. “캬!”하고 감탄하던 여행의 순간들이‘오사카’의‘카’와 닮아 있었다. 그렇게 54캬 책을 만들었다.



이름 없던 지난날의 여행들이 아쉬웠지만, 이제라도 제목을 지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소장용으로 만들었던 책





그 후, 여행을 떠날 때면 제목부터 생각했다. 이름을 붙여주는 것만으로도 여행의 의미가 생겨났다. 제목을 지어야 여행이 시작되었다.



다낭으로 여행할 때였다. 온 가족이 모여 여행의 제목을 고민했다.     

다낭?

다낭!

다낭.....

     

“다.아아아

낭.만 어때?”  

   

이행시를 짓듯 제목을 지었다.




여행은 모든 것을 낭만적으로 만드는 법. 다낭의 바닷가에서 소떼들을 발견했을 때에도 우리는 “다아아아 낭만”이라고 외쳤고, 담백하면서도 육수가 진했던 쌀국수를 만났을 때도“다아아아 낭만”이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예약한 풀 빌라를 직원이 업그레이드시켜 줄 때, 수영장과 바다가 연결된 듯 파랑이 펼쳐진 장면에서, 마사지 숍에서 미처 몰랐던 근육의 위치를 확인시켜준 손맛도 다 낭만이었다.      



바나힐 안에 있는 놀이공원에 갔을 때였다. 농구 골대에 골을 3번을 넣어야 선물로 미니마우스 풍선을 받을 수 있었다. 남편은 2번의 골을 넣었고 마지막 한 골을 남겨두고 아쉽게 넣지 못했다. 아이는 풍선을 받지 못해 울었다. 그 모습을 본 직원이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었다. NBA 자유투를 보는 것 같은 긴장감이 흘렀다. 극적으로 마지막 골을 넣었다. 그제야 풍선을 받은 아이는 폴짝폴짝 뛰었다.


낭만의 프레임으로 보니 낭만이 아닌 것이 없었다. 이것은 제목이 빚어낸 일이었다. 언어의 힘을 경험한 후 여행 제목 짓기는 꼭 해야 하는 것이 되었다.     



20대에는 친구들과의 여행이 잦았지만, 각자 가정이 생긴 후 만나서 여행을 가기 어려웠다. 그런 가운데 생긴 친구들과의 여행이었다. 아이가 어릴 때여서, 가족과 함께하는 여행은 아이가 먹을 수 있는 식당, 아이가 즐거운 곳 위주로 선택을 했었다. 그러다 보니 내가 가고 싶은 곳은 대부분 포기했다.


하지만 친구들과의 여행에서는 욕망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친구들이 좋아하는 것이었다. 쇼핑을 서둘러하지 않아도 되었고, 인기 많은 카페만 찾아다녀도 되었다. 줄이 긴 음식점에서도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 평소에 하고 싶었던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신이 났다. 이런 마음을 담아 여행의 제목을 지었다.     


“커맥커맥 오사카 어때?”     



커피, 맥주, 커피, 맥주 계속 이렇게 먹겠다는 다짐이었다. 친구들과의 여행이란 좋아하는 커피를 하루에 네 잔을 마실 수도 있고, 배가 불러 남기더라도 예쁜 케이크 한 조각을 더 시켜 먹어도 되었다. 식당 음식 맛이 없어도, 풍경 맛집이면 괜찮았다. 누구 하나 맛없는 식당을 선택했다고 나무라지 않았다.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과의 여행은 본능대로 움직일 수 있어 좋았다.


사진 좀 찍어달라고 부탁하지 않아도 기꺼이 서로의 포토그래퍼가 돼 주었다. 각자가 인생 사진을 만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서로의 파우치 속 화장품을 구경하고, 면세점에서 산 쇼핑품목을 구경했다. 걷다가 맥주를 마시고 저녁에도 또 맥주를 마셨다. 우연히 들어간 작은 식당에서 돈가스 한 입을 베어 물고, 육즙에 놀라 서로의 눈을 마주치며 감탄했다. 우연히 들어간 서점에서 82년생 김지영의 책을 발견하고 호들갑을 떨었다. 사소한 것에도 즐거움의 폭죽이 터졌다.     

갑자기 비가 내려도, 당황하지 않고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내 몸 하나 움직이면 되니 그마저도 간단한 일이었다. 엄마로서 가족과 함께 하는 여행과는 다르게 가볍고 경쾌했다.


여행은 제목처럼 흘렀다. 첫날에는 커피, 맥주, 커피, 맥주를 마셨고, 둘째 날에는 커피, 커피, 맥주, 맥주를 마셨다. 몇 달 동안 먹어야 할 커피와 맥주를 며칠 만에 다 마셨다.



다음의 여행지는 파리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제목이 떠오르지 않았다. 진부하지만 ‘모기 말고 파리’라는 제목이 선택되었다. 모기라는 단어가 머리에 들어와서는 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국내의 여행에서도 제목들은 쌓여갔다.

*수영장이 넓은 호텔로 여행을 갈 때는 웃음이 절로 나는 <호호호캉스 여행>

*나는 못 먹는 닭발을 언젠가 친구가 극찬한 적이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아이가 닭발의 맛을 궁금해했는데, 우연히 충주 여행에서 닭발을 만나 <닭발 여행>





*공주 여행에서 가을에 드라이브 쓰루로 먹은 밤이 너무 맛있어서 <밤 맛 여행>




*봄이면 수많은 벚꽃을 보아 왔지만 홍릉수목원의 커다란 벚꽃 나무는 처음이었다. 그 아래에서 꽃비를 맞으면 사진을 남긴 날은 <XXL 벚꽃 여행>


*옛날 물건이 가득해서 마치 과거 속 다방을 간 듯 복고적인 느낌의 애시당초카페 덕분에 강릉은<애시당초여행>


*충주에서 묵기로 한 숙소에서 아침으로 제공한다는 토스트의 이름에서 따온 <전남친(토스트) 여행>


*온돌방이 너무 뜨거워 잠 못 이룬 강화도는 <앗 뜨거워 여행>.


*여행을 떠날 때마다 BGM이 생기곤 하는데, 그날은 투투의 노래를 반복 재생해서 <일과 이 분의 일 여행 >


*제주도를 찾은 2월, 온 가족이 태어나 처음 만난 레드향에 빠진 <레드향 여행>


*평소에 잘 먹지 않았던 골뱅이탕을 먹고, 그 앞의 게임가게로 향했다. 뽑기에 소질이 없는 우리 가족은 여행의 묘미로 한 번 시도해보았다. 인형 뽑기 기계 안에는 아이가 정말 가지고 싶어 한 고양이 인형, 마요가 있었다. 그 인형을 본 순간 꼭 뽑아야 했다. 아이가 한 번, 두 번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내심 우리는 저 인형을 갖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 번째 시도에서, 인형을 뽑았다. 그렇게 기적을 체험한 <뽑기의 여왕 여행>


* 추석에 받은 육포가 너무 맛있어서 온종일 육포만 먹었다. 여행에서 먹었던 많은 음식이 생각이 안 날 정도로 존재감이 강렬했던 <육포 여행>


* 핼러윈에 갔던 <할로할로 여행>


* 남이섬으로 떠날 때는 <남이사 여행>으로 제목을 지었다.



*춘천으로 가는 길 차, 안에서 과자 성격검사를 했는데, 우리는 각자 <포스틱, 인디언밥, 닭다리>가 나왔고 그것을  제목으로 정한 여행.






어떤 여행이든 인상적인 순간이 존재했다. 모든 스토리를 다 기억할 순 없지만 강렬한 한 순간은 소유할 수 있었다. 제목으로 정하면 가능했다.


여행을 해 본 사람은 안다.

그 안에 환희, 우연, 실망, 좌절, 감동, 깨달음 등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 어떤 영화보다 드라마틱하다.

이렇게 여행은 하나의 서사이기도 하다.


나만의 영화를 흘러 보내기엔 너무 아쉽지 않을까?


제목이 있는 여행은 오랫동안  자의 마음속에 비디오테이프처럼 남아 있을 것이다. 테이프의 제목을 보고 영화의 장면을 떠올리듯 여행을 제목을 보면  순간을 선명히 떠올릴  있다.





여행의 제목이 쌓여 갈수록 가족의 여행문화가 되어갔다.


한 번하면 이벤트이지만

반복하면

수집하면


문화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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