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 소나기

by 따뜻한 다경씨


바닥도 끈도 고요한 밤하늘처럼 새까맣다. 그 위에 반짝이는 작디작은 은빛 별 하나. 캄캄한 밤을 비추는 평온한 별이 고단한 삶을 앓는 여린 몸을 슬그머니 끌어다 덮어준다.

분홍, 초록, 주황이 머물다 가는 계절이 간 곳 없이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모든 시간이 겨울처럼 꽁꽁 얼어붙었다고 여겼다.

엄마 눈빛에 싱그러운 여름이 넘쳐나기 전까지는.

‘엄마는 못 느꼈어? 할머니가 시원한 샌들을 원한다는 것을.’

딸아이는 알고 있었다. 할머니가 무거운 겨울을 벗고 잠시라도 여름을 신고 싶어 한다는 것을.

엄마는 울창하게 널린 신발 사이로 작은 별이 박힌 검정 샌들을 골랐다. 발등, 바닥, 벨크로가 있는 발목 밴드도 모두 밤하늘처럼 새까맣다. 별이 빛나는 여름을 신어서일까. 엄마 얼굴이 불꽃놀이 하듯 환하다. 그 바람에 나이도, 굳어버린 관절도 한여름 밤 꿈을 꾸듯 다시 살아나는 것 같다.

몰랐다. 나를 보는 게 아니라 여름을 보는 줄을, 지나가는 사람을 보는 게 아니라 싱싱한 초록을 보는 줄을. 엄마는 종종걸음으로 빠르게 걸어오는, 생기 넘치는 여름을 그렇게 미끄러지듯 내려보고 있었다.

연민을 꺼내 준 것은 전화 한 통이었다. 엄마를 향한 뜨거운 것들이 어느 모퉁이에서 멈춰졌는지, 어디까지 내려가 버렸는지 허기조차 없었다. 몇 년간 그칠 줄 모르는 소나기만 세차게 퍼부어댔다. 엄마의 치매가 내 연민을 모조리 가져갔다고 믿었다. 소나기가 지나가도 끼어들 수 있는 자리는커녕 품은 적 없는 낱말처럼 그것을 밀어냈다.

멀리 있는 엄마가 그립고 걱정된다는, 가까이 있으면 뭐든 해 주고 싶다는 전화기 너머 누군가의 애틋한 목소리. 그때야 구석으로 밀쳐 버린 연민이 생각났다. 오 년 전 엄마가 내 곁으로 오면서 시작된 소나기와의 전쟁, 한 번도 온 적 없는 무채색 계절을 겪고 있는 엄마를 보며 나도 함께 떠밀려 내려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내 몸 어딘가에선 엄마를 향한 연민을 잃어버릴까 두려움도 있었다.

그날 미뤄놓은 핑계처럼 연민을 들고 달려간 곳이 있다. 분홍 립스틱을 좋아했던 엄마. 오래된 문갑 속에 입이 갈라지고 황폐한, 손길이 끊겨 수분을 잃어버린 립스틱 두어 개가 뒹굴고 있는 게 떠올랐다. 나도 어느 순간, 코끝에 짙게 날아오던 립스틱 향내를 잊고 살다 보니 입이 낙엽처럼 말라버린 줄도 몰랐다. 그러니 엄마의 입술이야 하물며 더.

언젠가 엄마가 딸아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는데, 돌아보면 그때도 엄마는 딸을 보는 게 아니라 입술을 보고 있었다. 뽀송뽀송한 민얼굴에 도드라진 빨간 립스틱, 그 빨간 립스틱 앞에서 멈춰 선 엄마는 딸아이가 건네는 립스틱을 봄처럼 화사하게 바르고 있었다. 그러다 휴지로 입술을 듬성듬성 지우고 문갑 속에서 말라가는 자신의 오래된 립스틱을 꺼내 바르기 시작한다. 여름처럼 짧은 지난날을 생각하는 것인지 물들일 분홍이 말라간다고 안타까워했다.

진열대에 가지런히 놓인 립스틱 중 진분홍 립스틱을 집어 들었다. 금방이라도 동그랗게 피어날 것 같은 발그스름한 분홍색이다. 그것이 마치 보물이라도 되듯 바지 주머니 안에 깊숙이 넣었다. 엄마에게 선물할 립스틱이라고 생각하니 움켜쥔 손이 따뜻했다.

그날 전화기 너머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시간이 더 걸렸을지도 모르겠다. 노을이 번지든, 햇살이 깊어지든 마음에 뿌옇게 차오르는 안개 같은 더위로 줄곧 힘들었을 것이다. 분홍 립스틱을 건네는 날, 엄마도 내 마음이 립스틱 안에 담겨있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입술 선을 따라 곱게 색을 입히는 날이 많아졌다,

소나기가 멈추고, 캄캄한 바닥 밑에 들어있던 엄마를 향한 연민이 다시 일기 시작하면서 계절을 잃어버린 것은 엄마가 아니라 나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의 계절은 살아 있었다.

스케치북 속에 들어 있는 울긋불긋한 색깔들, 엄마는 틈만 나면 하얀 바탕에 그림을 그리고 형형색색 옷을 입혔다. 어떤 때는 수줍은 분홍을 물들이고 어떤 때는 비 갠 창밖을 보며 선명한 초록을 만들고, 가끔은 접어두었던 노을을 떠올리며 한 겹 한 겹 펼치기도 했다. 그런 엄마를 두고 나는 왜 무채색이 되었다고 생각했을까.

갑자기 닥친 소나기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세차게 퍼붓는 천둥과 소나기를 있는 대로 받아내면서도 다음날 툭툭 털어내고 말릴 용기가 없었다. 반복되는 소나기에 햇빛을 향한 입구가 아예 닫혀버렸다고 생각했다. 정작 무채색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은 엄마가 아니라 나였다.

새롭게 시작된 엄마와의 외출, 립스틱을 바르면서 엄마와 밖을 나서는 일이 잦아졌다. 분홍으로 한껏 들뜬, 짙은 여름을 놓치지 않으려는 엄마를 보며 그때야 남아있는 엄마의 계절이 얼마나 절박할까 싶었다. 내게도 얼어붙었던 것들이 그렇게 조금씩 녹고 있었다.

립스틱과 샌들은 엄마만의 계절이 아닌, 고단했던 나를 달래주는 엄마가 보낸 선물이었다. 비바람에 수런거리는 꽃 내음, 소스라치게 진한 초록, 노을 번지는 저녁, 뭉근히 익어가는 가을을 뒤돌아보며 그려보라는 엄마의 마음이 담겨있었던 것은 아닌지.

여름밤이다. 새까만 밤하늘에 별 하나가 반짝인다. 분홍으로 물들인 고운 입술도, 빛나는 은색 별도 한여름 밤을 밝히듯 환하다.

소나기가 한바탕 지나가면 가을 색이 점점 더 깊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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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