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쌍바는 무사할까

by 따뜻한 다경씨

길거리에서 한 남자가 큰 소리로 전화를 한다. 주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안하무인의 욕설에 빠진 남자, 눈살을 찌푸리고 못마땅한 낯빛으로 쳐다보고 싶은데 용기가 나지 않는다.


밤 아홉시 무렵 저녁 먹은 게 소화되지 않아 산책 겸 밖을 나섰다. 사거리 성당을 지나 돌아오는 길, 한겨울 추위 탓에 걸음이 묶인 탓인지 사람들로 붐빌 길이 앙상한 겨울나무처럼 듬성듬성하다. 도로변 차량들만 울긋불긋 한 줄에 꿰어진 장난감 자동차처럼 빠르게 달아나고 있을 뿐.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걸어갔던 길. 욕설에 빠진, 늙수그레한 그 남자만 아니면 한적했을 길이 점점 오그라든다. 순간적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간 욕과 술에 취한 남자에게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급류를 벗어나기 위해 죄 없는 걸음을 재촉했다.


아파트 건너 불빛 많은 상가 앞. 나이 먹어도 겁 많은 것은 여전해 무섬증이 사라질 때까지 온 몸이 딸꾹질 나듯 떨린다. 길가에 서 있는 나무도 애꿎게 삼킨 욕을 밤공기 속으로 가라앉히는지 수런거렸던 가지를 겨울바람에 털어내고 있다.


곧장 집으로 갔으면 좋았을 것을. 급류를 벗어나니 물살에 쓸려나갈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대낮처럼 넓고 환한 무인 아이스크림 매장에 복병이 있을 줄은 짐작도 못한 채.


매장은 아기를 안고 있는 젊은 부부만 아이스크림을 고르고 있다. 나도 노란 바구니를 들고 일곱 개 쯤 되는 냉동고를 차례로 돌면서 남편과 아이들이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골랐다. 설레임, 메로나, 요맘때, 쌍쌍바를 담은 후 마지막 칸을 열어 붕어싸만코와 빵빠레를 바구니에 넣고 계산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내 앞을 가로막는 낯선 그림자 하나. 마스크를 턱에 걸친, 덩치 큰 남자가 뜬금없이 휴대폰을 빌려달라고 한다.


마흔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는 허리춤까지 오는 검정 가죽재킷을 입었고 짙은 눈썹에 머리가 짧아 두 귀가 오롯이 눈에 띄었다. 남자는 내 손에 쥐어진, 빨간 휴대폰 케이스만 뚫어져라 보고 있다. 깍듯이 부탁해도 망설여지는데 풀 먹인 옥양목처럼 빳빳한 목소리로 휴대폰을 빌려달라는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젊은 부부는 간 곳 없고 넓은 매장 안에 나와 그 남자뿐이다.


빌려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다. 그래도 빌려 준 후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겠다는걱저이 더 앞섰다. 잠깐 머뭇거리다 배터리가 없다고 조심스럽게 말을 하고 돌아서려는데 남자가 손에 들고 있는 노란 바구니를 툭툭 건드리며 ‘한 통화면 됩니다.’라고 한다.


순간 얼마 전 뉴스에서 본 기사 하나가 떠올라 섬뜩한 기운마저 들었다. 어떤 남자가 젊은 아가씨한테 휴대폰을 빌린 후 도망치는 척하며 유인하여 두 시간 동안 화장실에 가두어 놓고 빌린 휴대폰으로 백만 원어치 넘는 물건을 샀다고 한다. 행인에 의해 가까스로 구출된 아가씨가 곧바로 경찰에 신고하여 범인을 잡을 수 있었지만 두 시간 동안 얼마나 무섭고 소름 끼쳤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꿍쳐둔 마음 없이 정말 필요해서 빌릴 수 있다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래도 불안감에 몸이 으스스 떨렸다. 겨울바람이 심술이라도 부려 밤길 지나는 누구든 들여보내 주었으면 싶었다.

입구 쪽에서 왁자지껄 소리가 난 것은 그때였다.


교복 차림의 몸집 좋은 남학생 둘이 가게 안으로 들어서는데 갑자기 굵고 단단한 동아줄을 잡은 듯 용기가 생겼다. 큰 목소리는 아니라도 '바빠서 바로 가야 된다'고 말해버린 것이다. 그리곤 학생들이 먼저 나갈까봐 바구니에 담긴 아이스크림을 냉동고로 넣기 시작했다. 종종걸음치는 불안감에 제자리가 아님을 알면서도 거의 그것들을 내몰듯 집어넣었다. 빈 바구니를 허겁지겁 올려놓고 나가는데 곁눈 사이로 힐긋 쳐다보니 미처 꺼내지 못한 쌍쌍바 하나가 바구니 모퉁이에 석고처럼 굳은 듯 팽개쳐져 있다.


신호등 앞, 빨간 불이 한참을 지나도 그대로다. 아까 그 학생들은 나오는데 매장 안 남자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안 본 사이 다른 길로 간 모양이다. 아니면 나처럼 겁 많은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래저래 조바심 내는 사이 신호등이 초록으로 변한다.


다음 날 아침, 창밖에 첫눈이 소복소복 쌓여 있다. 나뭇가지 위에 하얗게 내린 눈을 보고 있으니 문득 지난밤 꺼내지 못한 쌍쌍바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단단하고 통통하던 몸이 흐물흐물 녹아 형체를 알 수 없게 된 것은 아닌지. 처음 발견한 누군가가 다시 제자리로 넣어주면 좋을 텐데.


오후쯤 도로에 쌓였던 눈이 녹을 무렵, 드라이브 삼아 시내를 돌다 아이스크림 가게를 다시 찾았다.매장 안에 서너 명의 사람들이 평온한 손길로 아이스크림을 고르고 있다. 나도 간밤에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찬찬히 바구니를 옮기면서도 달콤하고 부드러운 이곳도 누군가에 의해 평온이 와르르 깨질 수 있다는 생각에 자꾸 멈칫하게 된다.


크고 작은 불안이 넘치는 세상, 불안하다고 아우성치지 않으려면 단단히 살피고 두드리며 살아가는 수밖엔. 단절감이라도 줄어들면 서로가 단단한 울타리가 되어줄 수 있을 것을.


바구니 속에 담긴 평온한 아이스크림들, 그들 중 지난밤 쌍쌍바도 섞여 있는 것은 아닐까. 추측컨대 그날 밤 홀로 남겨진 쌍쌍바는 무사했을 것이다.


커버이미지 출처: https://blog.naver.com/autumnalme/223402679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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