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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꼼지 Sep 15. 2022

로망과 현실 사이, 샐러드

  냉장고 청소를 하다가 야채칸 구석에서 비닐에 담긴 물컹한 것을 발견했다. 물에 잠긴 해삼의 형태를 하고 있으나 해삼을 산 적이 없으니 해삼일 리가 없는 물체를 보며 두려움에 떨었다. 저게 대체 뭘까. 끔찍한 형태로 미루어보아 냄새 역시 굉장할 게 분명했으므로 숨을 꾹 참고 비닐을 열었다. 하... 이번에도 파프리카였다. 본래의 고운 때깔을 잃어버린 채 축 늘어진 파프리카를 비닐에서 꺼내버리며 생각했다. 파프리카 한 알에 3천 원이 넘는 이 시대에 나는 왜 파프리카를 사고, 버리고, 또 사는 것일까.


  죄책감을 떨쳐버리려 청소를 이어가는데 냉장실 맨 위칸에 표면이 거뭇거뭇해진 양배추 반통이 보였다. 파프리카처럼 처참한 몰골로 변하지는 않았으나 선뜻 입에 넣기 망설여지는 양배추를 일단 한쪽 구석으로 밀어두었다. 겉잎을 떼서 먹으면 괜찮을 거야.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게 깊숙이 밀어둔 양배추는 찐득한 즙을 내뿜을 때쯤 다시 발견되어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냉장실 문쪽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유통기한이 지난 샐러드 소스들이 줄줄이 나타났다. 여러 가지 맛을 먹어보겠다고 서너 병이나 사놓았는데 하나를 제외하고는 포장조차 뜯지 않았다. 샐러드 소스병을 들고 유통기한을 한참 노려보다가 조용히 냉장고에 다시 집어넣었다. 개봉하지 않았고, 냉장고에서 한 번도 나온 적이 없으니 괜찮다고, 이제라도 얼른 먹으면 된다고 합리화했다. 하지만 저것들이 상하기 전에 다 먹으려면 오리엔탈 소스에 밥을 말아먹고, 발사믹 식초로 국을 끓여야 할 판이다.


  문득 마트에서 카트에 샐러드 소스들을 집어넣는 나를 보며 남편이 딸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네 엄마 또 버리려고 샐러드 소스 산다."

  그때는 "아니거든? 먹을 거거든?" 하면서 큰소리를 쳤었는데 또 이렇게 되고 말았다.


  냉장고 정리를 마치며 다짐했다. 오늘 저녁엔 꼭 샐러드를 먹고 말리라. 하지만 그날도 양배추는 냉장고를 탈출하지 못 했다. 딸이 잠투정 때문에 저녁내내 울고불고 하는 바람에 저녁을 먹지 못 했고, 공복과 피곤에 지친 부부는 딸이 잠들자마자 치킨을 시키는 데 합의했기 때문이다. 캔맥주와 함께 치킨을 먹는 동안 냉장고 속의 양배추는 단 한번도 떠올리지 않았다. 거뭇해진 양배추와 유통기한이 지난 소스들이 만나 샐러드가 되려면 얼마나 더 시간이 지나야할 지 알 수가 없다.


  이렇게 채소와 샐러드 소스들을 사서 냉장고에 잘 보관해두었다가 그대로 버리는 일을 몇 년째 하고 있다. 이제는 내가 집에서 샐러드 같은 걸 만들어먹는 데 소질이 없는 사람이라는 걸 인정할 때도 되었는데 그게 안 된다. 마트에서  채소코너를 지나갈 때마다 홀린 듯이 파프리카, 오이, 양배추, 양상추 따위를 집어든다. 이번 주말에는 샐러드를 만들어먹을 거라는 즐거운 상상을 하면서. 토요일 아침, 샐러드를 만들어서 토스트랑 같이 먹어야지. 양상추 위에 파프리카를 썰어올리면 얼마나 예쁠까. 맛도 좋고 살도 빠지겠지, 아흥.


  하지만 현실은 그런 달콤한 상상과 거리가 멀다. 일하며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삶에는 샐러드까지 만들어먹을 여유가 좀처럼 나지 않는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아등바등 살다금요일 밤이 되면 실체없는 누군가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올라 '내가 일주일동안 얼마나 힘들었는데, 금요일 밤이라도 방탕하게 보내주겠어!'하고 맥주를 꺼다. 고작 넷플릭스를 보며 치킨을 먹는 게 방탕한 생활에 낄 수나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다섯살짜리 딸을 키우며 일하는 엄마는 그것도 감지덕지다. 하지만 그렇게 금요일 밤을 불태우고 나면 토요일 아침에 눈을 뜨는 게 고역이다. 피곤해 죽겠어도 딸은 먹여야하니 억지로 몸을 일으켜 쌀을 씻고, 두부를 구우며 하품을 백번씩 한다. '아, 어제 일찍 잘 걸.'하는 후회가 가득한 머릿속에 샐러드 따위가 끼어들 틈은 없다.


  가끔은 남편과 싸우는 바람에 금요일 밤을 얌전히 보내기도 하는데, 그럴 때도 샐러드는 식탁에 오르지 못한다. 심각하게 싸웠을 때에는 밥을 먹지 않고, 미미한 냉기가 흐를 때는 끼니를 때우는 수준으로 해결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어떤 여자가 남편과 싸우고 화가 나서 죽겠는데 그와 함께 먹을 밥상에 샐러드를 올리겠는가. 샐러드는 뭐랄까. 햇빛이 환하게 드는 날, 행복한 가족이 꺄르르 웃으며 나눠먹는 그런 음식이 아닌가. 몸이 피곤하거나, 마음이 피곤하거나, 아님 둘 다 녹초인 상태로 매일을 살며 샐러드까지 챙겨먹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어느날, 좋아하는 작가의 유튜브를 보다가 문득 그의 삶이 부러워지고 말았다. 그의 일상은 정말 너무나도 우아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좋아하는 잡지를 읽으며 아침을 먹는다. 한참 일을 하다가 점심으로는 샐러드를(!) 먹는다. 나른한 오후에는 요가를 하며 잠을 깨우고 저녁이 되면 바짝 원고를 쓴다. 그의 삶이라고 고단하지 않겠냐마는 나는 글을 쓰느라 잔뜩 찌푸리고 있는 그의 미간까지 부러웠다. 샐러드를 먹고, 요가를 즐기며, 글 쓰는 일로 돈까지 벌다니! 내가 바라는 모든 것을 모아놓은 삶이었다.


  어떻게 하면 그처럼 살 수 있을까 생각해봤다. 그런데... 그게... 일단 남편도, 자식도 없어야 가능할 것 같았다. 아니면 남편과 자식이 있기는 있는데 언제나 나를 먼저 생각해주고, 집안일은 알아서 착착 해주고, 내가 힘들다 하면 "정말 힘들었겠다." 진심으로 공감해주고, 돈을 너무 많이 벌어와서 "너는 쓰고 싶은 글만 쓰고 일하지 마라."라고 호기롭게 말해주고, 저녁은 뭐해먹지 고민할 틈이 없이 유튜브를 보고 뚝딱뚝딱 밥을 해내고, "엄마 글 쓰는 동안 우리 딸은 아빠랑 놀자." 하면서 육아를 전담해주는 그런 남편이 있어야 하는 것 같았다. 그런 유니콘 같은 남편이 어딘가에 있기는 할까. 어딘가에 있더라도 나는 몰랐으면 좋겠다. 그런 남편이랑 사는 여자가 있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 나는 배가 아파서 죽을지도 다.


  유니콘과 사는 행운에 당첨되지 않았으니 오늘도 우아함과 거리가 먼 하루를 살아간다. 하지만 아마 이번주에도 나는 마트에 가면 또 샐러드 재료를 집어들 것 같다. 오늘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샐러드를 곁들인 따뜻한 식탁을 차릴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파프리카 한 알에 3480원, 양배추 한 통에 한 통에 4680원. 합쳐서 만원쯤 되는 돈에 나만의 로망을 담아내며 잠시 행복할 수 있다면 완전히 쓸모없는 일도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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