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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꼼지 Sep 22. 2022

숙주와 임신의 상관관계

  소주와 맥주로 시작한 음주생활이 과일소주의 시대를 지나 꿀막걸리에 이르기까지 내가 가장 사랑하 안주는 차돌박이숙주볶음이었다. 어떤 곳에서는 목살숙주볶음이기도 하고, 또 어떤 곳에서는 삼겹숙주볶음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기름진 것과 숙주를 휘리릭 볶아 나오는 그 요리는 최고의 안주였다. 너무 배부르지도, 느끼하지도 않으면서 술이 술술 들어가게 하는 그 맛.


  임신을 준비하기 위해 술을 끊으면서 종종 그 맛이 그리웠다. 그래서 밥 반찬으로라도 차돌박이숙주볶음을 만들어 먹기로 했다. 레시피를 찾아보니 별로 어려워보이지 않았다. 고기에 굴소스 따위를 넣고 기름에 볶다가 손질한 숙주를 넣고 휘리릭 볶아내면 끝. 그런데 생각해보니 나는 숙주를 손질해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잔뿌리를 잘라내고, 지저분한 잎도 떼내야 한단다.


  바구니에 소복하게 담긴 숙주를 하나씩 손질하는 데는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콩나물은 한 바구니 다 다듬는 데 이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숙주는 해도해도 진전이 없었다. 거실에서 야구를 보고 있던 남편에게 도움을 청했다. 손질하는 법을 보여주고 "요거 한 바구니만 다듬어줘!"라고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남편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 숙주를 다듬기 시작했다.


  하지만 잠시 후 그는 "이거 원래 이렇게 하는 거 맞아?"라며 나를 의심했고, 또 잠시 후에는 "이거 다 해야 해? 너무 오래 걸리는데?"라며 그만 하고 싶은 눈치를 보였다. 나는 원래 그렇게 하는 거라고, 다 해야 한다고 그를 설득한 후 바쁜 척 거실을 벗어났다.


  의심이 솟아오르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숙주 다듬는 데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면 대체 술집에서는 그 많은 숙주볶음들을 어떻게 만드는 거지? 그냥 안 다듬은 숙주볶음을 내놓는 건가? 아니, 숙주를 씻어서 볶기는 했을까? 내가 그동안 먹었던 숙주볶음들의 위생상태를 의심하는 지경에 이를 무렵, 남편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드디어 숙주 다듬는 일에 집중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다됐겠지 싶어 가보았을 때, 바구니의 숙주는 거의 그대로였다. 남편은 숙주를 손에 든 채 앉아서 졸고 있었다. 


  "숙주 다듬으랬더니 자고있냐!" 소리를 지르자 남편이 화들짝 놀라더니 다시 숙주를 다듬기 시작했다. 그리고 5분도 지나지 않아 다시 의심하기 시작했다.

  "원래 이렇게 하는 거 아닌데 우리가 뭘 몰라서 이러고 있는 거 아니야?"


  그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숙주를 쉽게 다듬을 수 있는 비법 같은 게 따로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많은 식당에서 숙주볶음을 반찬으로 줄 리가 없다. 나는 나의 무지에 대해 한탄했다. 숙주 다듬는 법도 모르면서 잘도 어른이 되서 결혼까지 했구나. 결혼하고 음식을 할 때마다 뭘 몰라서 이상하게 한 게 한두번이 아니었다. 미역을 물에 불려야 한다는 건 알았지만 불린 이후에 바락바락 씻어야 보드라워진다는 걸 몰랐고, 쌀의 양이 늘어날 때 밥물을 어떻게 잡아야하는지도 몰랐고, 된장국을 끓일 때 된장을 너무 많이 넣으면 국에서 쓴맛이 난다는 것도 몰랐다.  


  그런 것만 모르는 게 아니었다. 결혼을 하고 나서 깨달은 나의 가장 큰 무지는 '임신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에 관한 것이었다. 일단 주워들은 대로 엽산을 챙겨먹으며 남편과 밤마다 노력했으나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의심스러웠다. 연애 때의 격정과 므흣함이 사라진 남편과의 잠자리에 학구열이 불타올랐다. 우리는 수시로 토론했다. 배란테스트기의 색깔이 이 정도면 오늘이 배란일인가. 매일 하는 게 좋은가, 이틀에 한번씩 하는 게 좋은가. 가슴이 빵빵해진 것 같은데 임신일까, 아닐까. 배란이 뭔지조차 모르던 선사시대에도 인류는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았을텐데 우리는 그런 것들을 따지며 매일 밤을 보냈다. 


  임신이라는 미지의 세계에서 헤매는 건 우리만이 아니었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임신을 준비하던 친한 동생 L이 집 초대하더니 음료수를 내주다 말고 갑자기 급발진 했다.

  "언니네는 무슨 자세로 해?"

  "으응? 갑자기? 오전 열한시에 우리... 자세에 대해 얘기하는 거야?"

  뭔지 모를 민망함에 아하하하, 큰 소리로 웃고 나서 "자세는 왜?"하고 묻자 L이 고민을 털어놓았다.

  "뭔가... 제대로 골인이 안 되는 것 같아. 정자 한 마리 한 마리가 소중한데."

  "맞아. 그 중에 어떤 게 우리 자식이 될 지 모르는데."


  햇빛이 환하게 드는 L의 집 거실에서 우리는 자세에 대해 한참동안 이야기했다. 아가씨 때 조금 놀리기만 해도 얼굴이 새빨개지던 L은 "여자가 아래에 있는 게 위에 있는 것보다 낫겠지?"라는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유부녀가 되어있었다. 나는 유연성을 한껏 뽐내며 나와 남편이 애용하는 자세를 시연해보였다. 몸이 뻣뻣한 L은 나를 따라해보려다가 비명을 질렀다. 

  "언니! 다리가 찢어질 것 같은데 이걸 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고 아하하하, 웃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미친 것 같았다.


  임신이 간절한 미친 여자 둘은 급기야 국가교육과정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맨날 정자가 난자 만나러 가는 동영상만 보여주면 뭐. 어떻게 해야 잘 만날 수 있는지를 알려줘야지."

  "그니까. 출산율 높이려면 피임법만 알려주지 말고 임신법도 알려줘야 하는 거 아니야?"

  "근데 애들한테 임신 잘 하는 법을 알려주는 건 좀 이상하지 않나? 언니는 알려줄 수 있어?"

  "못 알려주지. 나도 모르는데."

  이렇게 헛소리를 해대다 또 아하하하. 아기를 갖는 일에 대해 솔직하게 대화하는 게 민망하고 또 민망해서 우리는 그날 계속 큰소리로 웃었다. 추어탕과 포도즙이 임신에 도움이 된다는 정보를 나눈 후 헤어질 때까지 우리의 궁금증은 전혀 해소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마음이 좀 편해졌다. 나도 모르지만 쟤도 모르는구나.


  이 글을 쓰면서 '그래서 숙주는 어떻게 다듬는건데?'하는 질문이 생겨 또 다시 인터넷을 뒤져보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숙주 다듬는 건 귀찮은 일이라고 하는 걸 보면 하나하나 다듬는 게 영 틀린 건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숙주 다듬는 거 너무 귀찮으니 깨끗한 물에 몇 번 씻기만 해도 된다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 사람들이 올린 차돌박이숙주볶음 사진을 보며 군침을 흘렸다. 하나하나 소중히 다듬어서 만든 숙주볶음이나, 몇 번 씻어 휘리릭 볶은 숙주볶음이나 똑같이 맛있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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