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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꼼지 Sep 26. 2022

청국장에 대한 오래된 복수

  꿈을 꾸었다. 문을 열었더니 새하얀 방에서 눈부신 빛이 쏟아졌다. 방 한가운데에는 예쁜 오렌지색 뱀 두 마리가 둥둥 떠 있었다. 왠지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꼬리잡기를 하는 것처럼 허공에서 빙글빙글 도는 두 마리의 뱀을 구경하고 있는데 한 마리가 갑자기 날아오더니 내 팔을 콱 깨물었다. 새빨간 피가 철철 쏟아지는 바람에 놀라서 깼다. 새벽 3시 40분이었다.


  찾아보니 뱀에 물리는 꿈은 재물이 생기는 꿈이라고 했다. 드디어 내 인생에도 볕이 드는구나. 자고 있던 남편을 흔들어깨웠다.

  "로또 사자."

  "자다 말고 뭔소리야."

  등을 돌리며 다시 잠을 청하려는 남편을 붙잡고 꿈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대단한 꿈을 꾸었다고, 어쩌면 우리에게 큰 돈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솔깃한 남편이 휴대폰으로 뱀꿈을 검색하더니 말했다.

  "근데... 혹시 태몽인 건 아닐까?"

   그러고보니 엄마도 뱀꿈을 꾸고 나를 가졌다. 날개 달린 초록색 구렁이가 엄마를 태우고 하늘을 날아다녔다고 했다. 태몽을 듣는 어른들마다 "딸이 엄마 호강시켜줄 건가보네!"라고 했었는데.

  

  로또에서 태몽으로 마음이 급격히 기울었다.

  "태몽? 그럼... 꿈에 뱀이 두 마리였는데 쌍둥이인가? 쌍둥이인가봐!"

  남편은 헛소리 말고 잠이나 자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조금 기뻤다. 자식을 하나씩 차근차근 낳기에는 부담스러운 나이니 한 방에 둘이 생기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남편의 혈통에도, 나의 혈통에도 쌍둥이는 없었으나 왠지 쌍둥이를 가질 것만 같은 예감에 설레하며 다시 잠이 들었다.


  다음날, 거짓말처럼 임신테스트기에 두 줄이 떴다. 태몽의 과학적 원리는 알 수 없지만 꿈 속의 오렌지색 뱀은 정말로 아기였다. 임산부들 사이에 '친정아빠'라는 별명이 붙은 할아버지 의사선생님이 초음파로 배를 들여다보며 아기가 집을 잘 지었다고 칭찬해주었다. "쌍둥이는 아니에요?"라고 물었더니 인자하게 웃으며 절대로 아니라고 했다. "느낌이 딱 쌍둥이였는데..." 하고 질척거리자 남편 창피하다며 조용히 하라고 했다.


  임신을 축하하며 남편이 성대한 꽃다발을 사주었다. 엄마는 최고급 과일을 냉장고에 쟁여주었다. 하지만 임신은 좀처럼 실감나지 않았다. 배가 부풀어오르는 것도 아니고, 뱃속에서 뭔가가 느껴지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초음파 기계로 볼 때에만 아기의 존재를 확인할 있었다. "쿠왕쿠왕 쿠왕쿠왕...!" 기차가 지나가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우렁차게 뛰고 있는 아기의 심장소리를 들었는데도 몸 속에 아기가 살고 있다는 게 가끔은 믿기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김밥을 싸려 김 봉지를 뜯다가 구역질을 했다. 오래된 김의 쩐내가 느껴졌다. 유통기한이 한참 남은 새 김에서 그런 냄새가 나는 게 이상해서 남편을 불렀더니 김 냄새만 난다고 했다. '내 코가 이상한가...?' 하며 김밥을 쌌고, 남편은 맛있다며 세줄이나 먹었다. 하지만 나는 그 냄새 때문에 김밥을 먹고 꼭 체했다.


  얼큰한 것으로 답답한 속을 달래보려 단골 칼국수집에 갔다. 그런데 맛이 너무 없었다. 혀에서 느껴지는 건 뜨거움 뿐, 얼큰함도 감칠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결국 칼국수를 먹고 또 체했다. 속이 답답하고 울렁거리는 게 어찌나 괴로운지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아기 때문에 소화제 하나 마음대로 먹을 수 없는 몸이니 등을 두들겨라, 팔을 주물러라 남편만 부려먹었다. 하지만 전혀 괜찮아지지 않았다. 입덧이 시작된 것이었다. 아기는 초음파 노이즈와 아기를 구분하지 못 하는 엄마에게 입덧으로 본인의 존재를 어필하고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냄새가 무서웠다. 샴푸와 바디워시를 바꿨다. 달콤한 꽃향기 때문에 속이 울렁거려 씻을 수가 없었다. 화장품도 무향으로 바꿨다. 냄새 분자들이 입 안으로 들어와 맛으로 느껴지는 것 같았다. 샴푸맛, 비누맛, 로션맛... 냄새를 견딜 수 없는 것은 물건만이 아니었다. 지하철에서 부대끼는 사람들, 직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물론 남편의 냄새까지 다 싫었다. 가능하다면 샴푸, 비누와 함께 남편까지 무향으로 갈아치우고 싶었다.


  입덧이 시작됨과 동시에 요리는 포기했다. 하지만 뱃속에 아기가 있으니 뭐라도 먹을 수 있는 것을 찾아야했다. 남편에게 순두부찌개를 포장해오라고 했다. 몸에 탈이 날 때마다 먹고 기력을 찾았던 음식이었다.

  "나는 김치순두부, 자기는 자기가 먹고 싶은 걸로 포장해와."

  이게 실수였다. 그날 남편이 선택한 메뉴는 ‘청국장 순두부’였다. 남편이 청국장 순두부를 데우기 시작하는 순간, 온 집안에 고릿고릿한 냄새가 퍼져나갔다. 청국장의 강렬한 냄새에 구역질을 하며 나는 잠시 그와의 결혼을 후회했다. 저 인간은 하필 왜 청국장 순두부를 고른 걸까. 눈치가 없는 걸까, 생각이 없는 걸까.


  하지만 내가 임신한 이후, 꼬마 집요정처럼 집안일을 해대는 남편에게 먹는 걸로 구박을 할 수는 없었다. 대신, 남편에게 입덧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이해시키기로 했다.

  “입덧이 어떤 느낌이냐면 말야. 24시간 체해서 속이 울렁울렁하는 거랑 비슷한 거야. 체한 느낌 알지?”

  “아니. 나 태어나서 한 번도 체해본 적 없는데?"

  “그럼 멀미하는 느낌은 알아? 시골길 같은 데 달리면 토할 것 같잖아.”

  “나 멀미 안 해.”

  속이 건강한 사람이라는 건 알았어도 일생동안 체해본 적도, 멀미해본 적도 없는 대단한 사람과 결혼한 줄은 몰랐다. 숙취의 느낌에 빗대서 설명할까 하다 포기했다. 소주 두 잔이면 잠들어버리는 인간이 숙취라고는 알까.


 인간은 경험하지 일을 이해하는 취약한 종족이므로 도직입적으로 말하기로 했다.

  “그냥 이제 청국장 같은 건 사오면 안 돼. 냄새 많이 나는 건 다 안 돼.”

  “알겠어. 미안해.”

  역시 공감을 구하는 것보다 구체적인 행동으로 설명해주는 게 빨랐다. 세제 냄새를 맡을 수 없으니 설거지랑 빨래는 당분간 자기가 해줘. 음식은 최대한 냄새가 나지 않는 걸로 부탁해. 당분간 청국장은 절대 금지야. 고개를 끄덕이는 남편을 보며 나는 속이 안 좋아서 밥을 먹을 수 없으니 이왕 사온 청국장은 먹으라고 했다.


  하지만 정말로 청국장을 밥에 쓱쓱 비벼 맛있게 먹는 남편을 보자 부아가 치밀어올랐다. 나는 너 때문에 속이 뒤집어졌는데 먹으란다고 정말로 먹냐! 조용히 복수를 획했다. 새벽 두시에 깨워서 딸기가 먹고 싶다고 해야겠다. 추운 날, 나가서 냉모밀을 포장해오라고 해야겠다. 그리고 그가 집에 돌아오는 순간, '우웩! 이제는 먹겠어!'하면서 허망하게 만들테다. 완벽한 계획이었으나 복수는 시작도 했다. 나는 입덧이 사라지던 그날까지 바닥에 붙은 풍선껌처럼 침대에 늘어져 속이 가라앉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아주 오랜 후, 뜻밖의 인물에 의해 복수가 이루어졌다. 남편이 또다시 청국장 순두부를 사온 어느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청국장 냄새를 맡게 된 딸이 질색을 했다. "이게 무슨 냄새야!" 조그만 코를 틀어쥐고 팔팔 뛰는 딸을 보며 남편은 어쩔 줄 몰라했다. "아빠가 밖에 나가서 먹을까? 미안해."

  쩔쩔매는 남편의 모습을 지켜보며 난 몰래 웃었다. 입덧하는 아내 앞에서도 청국장을 먹더니, 딸한테는 너도 안 되는구나. 기대치않게 이루어진 5년만의 복수에 마음이 개운해져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설거지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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