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년이 훌쩍 지난 일들을 정확한 날짜까지 기억해 기입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
읽는 사람도 이 부분은 동의할 거라 내 맘대로 결정짓고 졸업은 2월, 입사, 퇴사 역시 달(月)만 기입하고 만다.
한 장 가득 빼곡하다.
꾸준히, 한 우물만 팠다면 간결, 명확 이해하기 쉬운 이력서를 작성할 수 있었겠으나,
내 이력서는 부연설명에 각주가 붙어야 일과 일 사이의 연관 관계, 서론, 본론, 결론이 맞춰지는
이력서 되겠다.
즉, 좋은 말로 다양한 경험, 끊임없는 도전의 흔적이나 나쁜 말로 딱히 모르는 것도 없지만
제대로 아는 것도 없을 것 같은, 전형적으로 집중력과 인내심이 부족해 보일 수 있는 사람의 이력서로 보인다.
그래서 난 자기소개서에 사활을 걸기로 했다.
노트북 자판 위 가지런히 놓인 두 손.
부릅뜨고 화면 꼭대기 위 <자기소개서> 제목을 째려보고 있는데..
멍….. 총체적으로 멍스럽게 30분이 훌쩍 지나갔다.
40분 즈음 지나자 한 가지 확실한 느낌이 온다.
오늘 내로 채우기는 글렀구나.
이때부터 입술이 달싹 달싹, 홀린 듯 자판을 두들기는데, 썼다는 게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 젠장!
두어 번 일필휘지(一筆揮之), 한껏 신나게 써서 제출하고 낙방을 해 본 뒤 알았다.
아! 취업하려는 곳의 성격에 맞춰 보다 디테일하게 자기소개서를 쓸 필요가 있겠구나!!
‘나의 이력이 주어질 업무에 어떻게 영향을 끼칠 것이며, 이렇게 준비해온 내가 누구보다 적임자이며, 오직 귀사에 입사하기 위해서 이런 경험들을 해 왔다.’
다양한 이력들이 자연스럽게 연결고리를 타고 어우러져 ‘바로 이 사람일세!’ 무릎을 탁! 치게 만들어야 할 것 같은데, 거기서 딱! 그만이다.
왜 안 써지는 걸까. ………
알 것 같다.
문제는 ‘사실, 팩트’ 때문이다.
이직하려는 분야와 내가 일해왔던 분야가 아예 다르다.
게다가 열심히 산 것 같지만 대놓고 화려한 이력과 스펙은 없다(그랬다면 이러고 있지 않았겠지),
그럼에도 넘치는 열정과 끈기로 매사 성실하게 일할 자신이 있다는 말을 왠지 써야 할 것 같은데,
그러려니 낯 뜨겁다 못해 진부하다.
내가 해 온 일들을 통해서 얻은 교훈과 가치를 하려는 일들과 어찌어찌 연결시켜 줄줄줄 하자니
난데없이 꼰대님이 등장하신다..
사실만 쓰려니 볼 품 없는 것 같고,
아닌데 그런 것처럼 쓰려니 부자연스럽고..
이래선 내일도 모레도 완성하지 못할 것 같다.
아닌데 그런 척 하기.
‘척하기’가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척해본’ 사람은 잘 안다.
그리고 하필 내가 그렇다.
손톱 그만 뜯고 정공법으로 가시죠.
나는 이런 사람이다. 이렇게 살아왔다. 일은 왜 하고 싶은지, 어떻게 할 것인지,
담백하게 씁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