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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줄 Mar 29. 2016

3-1. 내 인생의 그레이티스트 히트

나단 우리는 남아 있던 소주를 동시에 입에 털어 넣은 후 가게를 빠져나왔다. 시계를 보니 곧 자정이었다.

 "어쩔 거냐?"

 수호가 내게 물었다.

 "뭘? 벌써 들어가게?"

 "아니, 너 괜찮으면 한 잔 더 하자는 거지."

 "아직 멀쩡해. 그냥 딱 기분 좋은 정도야. 아, 기분 좋다!"

 그러자 녀석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내가 정말로 기분이 좋은지 확인하려는 듯한 얼굴이었다. 우리는 편의점에서 캔 맥주를 사서 길옆 벤치에 앉았다.

 지금 이 순간을, 혹은 오늘만을 놓고 보자면 기분이 좋다는 내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낮에 은행에 들러 지난 3년간 부은 적금을 찾은 후로 조금은 뿌듯하고 으쓱한 기분이었다. 그걸 구실로 방금 수호에게 한턱을 쏘기도 했다. 아니, 아직 한턱은 끝난 것이 아니다. 이 정도로 이 밤을 마감하고 싶지는 않다. 이 시간에 침대에 누워 봐야 어제처럼, 그제처럼 누나 생각에 잠 못 들 게 뻔하다. 

 또 오늘은 석 달 만에 디에고에게서 반가운 이메일이 오기도 했다. 그는 지금 태국에 와 있는데 아쉽게도 이번엔 나를 만나고 갈 시간이 없다고 했다. 삼촌의 여행사에서 중책을 맡고 있는 터라 시도 때도 없이 세계 각국을 왕래하는 것이 그의 일상이었다. 사실은 일반적인 여행사는 아니고 음성적인 일들을 전문으로 하는 곳이었다. 디에고가 담당하는 일도 일종의 브로커 같은 것이었다. 어렸을 때 본 디에고의 삼촌을 생각하면 확실히 평범한 직업이 어울리는 남자는 아니었다. 그가 몰던 '76년형 캐딜락 엘도라도 컨버터블'엔 가끔 동료 혹은 친구로 보이는 사람들이 동승하곤 했는데 그들 역시 하나같이 만만치 않은 분위기의 사람들이었다.

 5년 전 디에고가 처음 태국을 찾았을 때는 일부러 나를 만나러 한국에 들러 주었다. 그게 무려 6년 만에 그를 만난 거였는데 어느새 다시 5년이라는 긴 세월이 시간의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없었다. 금요일 새벽에 그는 아르헨티나로 돌아간다고 했다. 이번에도 이메일 끝에 꼭 한 번 놀러오라는 얘기를 적어 놓았다.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해 주는 그가 늘 고마웠다.

 디에고는 내가 미국에서 사귄 거의 유일한 친구다. 나보다 다섯 살 위인데, 당시에 그는 아직 애송이에 불과하던 나와 달리 수염이 짙게 자라고 얼굴 골격이 다 자리 잡힌 어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외모로는 거뜬히 열다섯 살은 많아 보였다. 

 그는 그 시절부터 줄곧 나를 '눈물'이란 애칭으로 불렀다. 때문에 지금까지도 편지의 첫머리는 항상 '눈물에게(dear tears)'로 시작한다. 우리가 처음 친구가 될 무렵에 내가 늘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는 게 그 이유다. 제대로 본 것이, 그 즈음 내 안엔 정말로 울음이 가득했다. 다행히 그것들이 전부 눈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족히 늘 울고 다니는 아이 같은 인상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우리는 무심히 벤치에서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맥주는 이미 비운지 오래. 잠시 침묵하는 사이 어디선가 검은색 포르쉐 한 대가 나타나 편의점 앞에 멈춰 섰다. 언뜻 우리 또래의 남녀가 타고 있었다. 처음 보는 차도 아니건만 오늘따라 유난히 시선을 끌었다. 수호의 차보다 만 배쯤 좋아 보였다. 그들은 다정하게 서로의 허리를 감싸 안은 채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후 다시 차에 오른 그들은 묵직한 배기음을 남기고 시야에서 사라졌다. 순간 나는 마치 그 차에서 영감을 얻기라도 한 것처럼 기발한 계획을 생각해 냈다. 

 "야, 우리 오늘 호텔에 가서 자 보지 않을래? 서울에서 제일 좋은 호텔 말이야."

 "무슨 개소리야? 집 놔두고 웬 호텔?"

 수호는 눈을 감은 채 입으로만 대꾸하고 있었다.

 "적금도 탔겠다, 그냥 재미삼아 유명한 호텔에서 한번 자 보자구. 일반실 정도야 못 잘 거 있겠어?"

 그는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나를 봤다.

 "이게 취해서 내가 여자로 보이나. 너 돌았냐? 그리고 그런 데가 하룻밤에 얼만 줄 알아? 일반실이라도 아마 삼십만 원은 할 걸?"

 하지만 내가 아는 그는 여유가 없어도 쓰는 데는 꽤나 헤픈 사람이었다. 혹은 헤프기 때문에 여유가 없었다. 그는 저축 같은 것에 도통 관심을 두지 않았다. 수년 동안 각종 아르바이트와 이런저런 직장생활을 해왔다지만 모아 둔 돈이 하나도 없었다. 마흔이 되기 전엔 돈에 의미를 두지 않겠다는 게 자기의 철학이라고 했다. 대신 마흔부터는 인생에서 오로지 돈만을 우상숭배할 거라고 궤변을 늘어놓았다.

 "너 호텔에서 자본 적 있어?"

 "나? 물론 제대로 된 호텔은 한 번도 못 가봤지. 내가 그런 데 갈 일이 뭐가 있냐?"

 "나도 그래. 그러니까 오늘 제대로 된 호텔이 어떤 데인지 구경이나 해보자고."

 "이 새끼가 뭘 잘못 먹었나. 너 재우 모아갖고 오늘 그 돈 다 써버릴 거냐? 그래서 돈 모으겠어? 인생 그렇게 막 사는 거 아니야."

 스위트룸에서라도 잔다면 모를까 호텔 한 번 간다고 탕진할 돈은 아니었다. 호텔 한 번 간다고 돈도 못 모을 사람이란 평가를 받는 것은 부당했다. 녀석에 비하면 나는 아주 검소한 편이었다. 여러 해 전부터 계획적인 지출과 저축을 해오고 있음은 물론이다. 아저씨에게 물려받은 재산도 철저히 관리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이 아닌, 수호에게 이런 말을 듣고 있다는 게 가장 큰 넌센스였다.

 "네가 전에 일본 작가 얘기한 적 있지? 문학상 타서 받은 상금을 경마장에서 단 한 번의 베팅으로 다 날려 버린 사람. 난 그 얘기 듣는데 한편으로는 조금 부럽더라. 그 배짱이 말이야."

 "야, 그건 배짱이 아니라 미친 거지."

 "너 그땐 그런 행위는 어쩌면 돈에 대한 냉소일 수도 있다고 말했잖아?"

 "내가? 내가 그런 멋있는 말을 했다구? 오, 취했었나?"

 그는 좀체 고집을 꺾지 않았다. 초저녁도 아니고 단 몇 시간을 자자고 그 돈을 쓰냐며 계속 나를 얼빠진 놈 취급했다. 그가 뭐라 하든 오늘만큼은 나도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끝내는 납치하듯이 그를 택시 안에 우겨넣는 데 성공했다.

 "모르겠다. 네 돈이지 내 돈이냐. 도착하면 깨워라."

 그는 마침내 항복을 선언하며 눈을 감았다. 속도계는 어느새 130킬로미터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강변을 질주하는 총알택시 안에서 정지해 버린 듯한 한강의 야경을 바라봤다. 오늘따라 밤의 한강이 유난히 거대해 보였다. 현란한 조명으로 얼굴을 화장한 다리들. 투신할 듯이 강을 굽어보는 건물들의 깜박이는 눈들. 불빛들 사이를 흐르는 한강의 새카만 몸뚱이야말로 오히려 진정 빛을 내고 있는 느낌이었다. 

 호텔에 당도하고 보니 트윈룸의 가격이 예상보다도 더 비쌌다. 그제야 다소 부담이 느껴졌지만 가슴속에서 오늘만의 예외적인 사치심을 길어 올려 그것을 떨쳐 버렸다.

 "살다 보니까 나도 이런 데서 자볼 날이 오는구나. 역시 인생은 오래 살고 봐야 돼!"

 수호는 갑자기 신이 나서는 내게서 키를 빼앗아 앞장섰다. 객실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탄성을 내뱉었다. 녀석이 침대 위에 쓰러지며 말했다.

 "와, 진짜 좋다. 돈 많이 벌면 여기서 아예 장기 투숙으로 살아 버려야지. 매일 룸서비스나 받으면서."

 "뭐야, 아까는 어울리지도 않게 혼자 검소한 척은 다 하더니만. 왜 그 같잖은 절약 타령 또 해보시지?"

 "야, 너 적금 많이 탔다고 했지? 내일도 여기서 자면 안 되냐?"

 도무지 앞뒤가 안 맞는 녀석의 태도에 말문이 막혔다. 그래도 값만 비싸고 좋지도 않다고 불평하는 것보다야 그런 반응이 훨씬 나았다. 모든 게 다 좋았다. 역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오늘밤만큼은 혼자 누나 문제로 고민하고 싶지 않았다. 엉뚱한 방법이지만 나는 이렇게라도 해서 그 고민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불청객이 하나 있었다. 공간 때문인지 분위기 때문인지 가슴속에서 말이 되고 싶어 꿈틀거리는 아득한 한숨. 평상시 깊은 곳에서만 놀던 그 소리가 기도를 타고 빠르게 위쪽으로 헤엄쳐 올라와 나를 당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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