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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줄 Mar 31. 2016

3-4. 내 인생의 그레이티스트 히트

 물론 내가 털어놓고 싶은 건 이런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가 알아주었으면 하는 건 따로 있었다. 알아주었으면 좋겠지만 결코 꺼낼 수 없는 말. 실수로라도 엎질렀다간 큰 사고가 되어버릴 말. 어쩌면 다시는 주워 담을 수 없을 그 말.


 씻으러 들어갔던 수호가 욕실에서 나왔다. 웃통을 벗은 채 흰 타월만을 하반신에 두르고 있었다. 녀석은 몸을 말리지도 않고 그대로 침대 위에 널브러져서는 눈만 슴벅거렸다.

 "여기 오니까 안 오던 잠이 막 쏟아지네. 역시 나는 럭셔리하게 살아 줘야 할 팔자라니까."

 잠꼬대처럼 실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더니 곧 그는 뭔가 생각에 잠기는 얼굴이었다.

 "어떠냐?"

 낮게 깔린 그의 목소리가 나를 긴장시켰다.

 "뭐가?"

 "기분 말이야."

 "좋아. 돈은 하나도 안 아까워."

 "그 말이 아니고."

 "응?"

 "네 누나 일 말이야."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잠시 잊고 있었는데 그의 질문으로 순식간에 가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는 희미하게 술기운이 묻어 있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야, 내가 취해서 하는 헛소리니까 대충 알아서 들어라. 나는 네가 꼭 누나를 만났으면 좋겠다. 누나를 되찾았으면 좋겠어. 처음엔 힘이 들겠지만, 극복해야 할 것들이 많겠지만, 어차피 그 사람은 네 누나야. 너를 엄청 사랑해 주었다던 네 누나. 그럼 네겐 드디어 다시 가족이란 게 생기는 거잖아. 오랫동안 네 곁에 없었던 거."

 그는 내 한숨까지도 대신할 것처럼 육중한 한숨을 내뱉었다.

 "나는 네가 너무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하튼 너는 나랑 제일 친한 놈이니까. 우정이고 나발이고 그 따위 걸 말하려는 게 아니고, 적어도 네가 지금껏 내 인생에 피처링한 자식들 중에선 제일 쓸 만한 놈이라는 거야. 말하자면 내 그레이티스트 히트가 바로 넌데, 그런 니가 행복하다면 내가 얼마나 기분이 좋겠냐. 그러니까 당부하는데 누나 꼭 만나라. 너 회자정리, 거자필반이라는 말 알지? 우리는 언젠가 모두 헤어지지만 결국 또 다시 만나게 된다는 말. 너랑 네 누나는 그동안은 잠시 헤어질 시기였던 거라고 생각해라. 그리고 이제 다시 만날 때가 된 거라고. 알았냐? 용서할 게 있으면 다 잊고 용서해라. 네가 안아 줘라, 네 누나. 그래서 부디 같이 행복해져라, 이 화상아."

 그는 나를 쳐다보지도 움직이지도 않았다. 다만 뜨고 있던 눈을 감았을 뿐. 나는 목소리에 물기가 배지 않도록 아득바득 힘을 실어 말했다.

 "응. 알았어. 고맙다. 졸려 보이는데 빨리 자라."

 나는 욕실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물을 틀었다. 겨우 지연시킨 어떤 감정이 왈칵 얼굴에 나타나려고 했다. 그것들을 꾹꾹 눌러 삼키는 데 꽤 시간이 걸렸다.

 밖으로 나왔을 때 수호는 호텔이 무너질 정도로 코를 골며 잠들어 있었다. 나는 그의 옆 침대에 누웠다.

 "잘 자라, 수호야."

 그는 알았다고 대꾸하듯이 코를 골았다.

 "너야말로 내 인생의 그레이티스트 히트다. 내 삶에 찾아와 줘서 진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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