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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줄 Mar 31. 2016

3-3. 내 인생의 그레이티스트 히트

 방학이 끝나 갈 때쯤 아빠는 어디론가 자취를 감췄다.

 "이제 그 사람 여기 오지 않을 거야. 너도 그렇게 알고 있어."

 그리고 동시에 엄마의 애인이라는 다른 남자가 집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빠가 사라졌다고 내게 평화가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며칠 뒤 엄마는 내게 뜻밖의 선언을 했다. 미안하지만 나를 더 이상 보살펴 주지 못하겠다고. 엄마 노릇은 이제 여기까지만 해야 할 것 같다고. 자기는 달라스를 떠나 피츠버그로 갈 거라고.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거라고. 

 나는 엄마에게 매달리거나 빌지 않았다. 그래봐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이제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다. 두 뺨은 눈물로 범벅이면서도 마치 초면의 사람과 이야기하듯 공손하게 그것을 물었다. 알고 보니 엄마는 내 거취에 대해서도 미리 다 손을 써 놓은 상태였다. 엄마와 알고 지내던 한 한인(韓人) 아줌마의 도움을 받아 내가 레니 김이란 재미교포의 집에 들어가 살게끔 조치해 놓은 것이었다. 나는 당장 그 아저씨가 사는 시애틀로 가야 했다. 가고 싶지 않았다. 누나가 사라진 후로 그곳에서의 하루하루가 끔찍하기만 했지만, 그렇다고 아는 이 하나 없는 곳에서 생판 모르는 누군가와 다시 가족이 되어야 한다는 건 그것대로 내게 또 하나의 공포였다. 가장 두려운 건 행여 어느날 누나가 집으로 돌아와도 그땐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눈사태처럼 덮쳐 오는 불안들로 그 무렵 나는 매순간 질식해 버릴 듯한 상태였다.

 그러나 결국 나는 내 뜻과 상관없이 완전히 다른 삶 속으로 편입되었다. 새로운 가족, 새로운 집, 새로운 동네와 새로운 친구들까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마음을 정착시켜야 할지 당혹스러웠다. 하필이면 레니 김 아저씨마저 말수가 아주 적은데다가 쉽게 자신을 내보이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 디에고가 있었다는 건 정말이지 내게 구원과도 같은 일이었다. 바로 옆집에 살던 디에고는 당시에 아저씨의 세탁소에서 일주일에 두 번씩 아르바이트를 했다. 때문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되었다. 나는 디에고와 친해지면서 그나마 빨리 새로운 삶 속에 용해될 수 있었다. 다행히 아저씨도 알면 알수록 믿음이 가는 분이었다. 아저씨는 젊은 나이에 아메리칸 드림을 안고 미국으로 건너와 거의 20년째 시애틀에서 살고 있었다. 부인과 아들이 있었는데 4년 전 교통사고로 그만 둘 다 유명을 달리했다고 했다. 그 슬픔의 무게를 짐작했다고 하기에 나는 너무 어린 나이였지만 사실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돌이켜 보면 나 역시 모든 것을 잃고 그곳까지 떠밀려 간 상황이었으니까. 어쨌든 아저씨는 감사하게도 나를 온전히 한 식구로 맞아 주었고, 비록 돌아가실 때까지도 끝내 아버지라는 호칭을 허락하지는 않았지만, 내 인생을 통과해 간 세 명의 남자들 중 유일하게 진정한 의미의 아버지가 되어 주었다. 

 어느 날 아저씨는 내게 책 한 권과 테이프 하나를 내밀며 한국말 공부를 권유했다. 그 전부터 아저씨는 알아듣든 말든 내게 건네는 말의 일부는 한국말을 사용하곤 했다. 때문에 나 스스로도 이미 그것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하고 있었다. 마침 아저씨의 제안이 계기가 되어 나는 한국말 정복을 마치 내 일생일대의 과업처럼 여기고 매진하기 시작했다. 아저씨에겐 늘 감사하다는 생각뿐이었기에 사실 시키는 건 뭐든지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나는 그렇게 차츰 안정을 되찾아 갔다. 내게 가시처럼 박혀 있던 고통들은 결코 완전히 제거할 수 있는 종류의 것들은 아니었지만 아예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한 꺼풀 무뎌졌다. 그러자 차차 시애틀이란 도시의 아름다움도 눈에 들어왔다. 아니, 꼭 아름다움을 알았다기보다는 막연히 시애틀을 감싸고 있던 분위기에 흠뻑 마음을 뺏겼다. 막 비가 그친 저녁에 디에고 삼촌의 지붕을 연 캐딜락을 타고 시애틀의 올드타운을 드라이브하던 기분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청량한 물기를 머금은 바람. 운치로운 거리와 건물들. 차 안에 요염하고 구슬프게 흐르던 메르세데스 소사의 음악까지.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는 내가 시애틀로 온 바로 그 해에 앨리스 인 체인스의 Facelift 음반이, 그리고 이듬해인 91년엔 펄 잼의 Ten, 너바나의 Nevermind, 사운드가든의 Badmotor Finger 앨범들이 잇따라 쏟아져 나오며 '시애틀 사운드'의 시대를 점화시켰다는 점이다. 때문에 세계의 눈은 일시에 시애틀로 집중됐다. 시애틀이 하루아침에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도시가 되어 버린 것이다. 당시에 '그런지 락'의 열풍에 휩싸인 시애틀의 분위기는 정말 굉장했다. 나도 바로 그때부터 내 손으로 음반들을 사 모으며 본격적으로 음악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날들도 오래 가지 못했다. 아저씨는 말년을 꼭 고국인 한국에서 보내고 싶어 했고 돌아가서 다시 자리잡는 과정을 감안하면 너무 늦기 전에 그것을 실행에 옮겨야 한다고 했다. 그것은 나에겐 또 한 번 눈을 질끈 감고 아랫입술을 꾹 깨물어야 할 사건이었다. 그러나 달리 방도는 없었다. 결국 나는 시애틀에 정착한지 꼭 3년 만에 아저씨를 따라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내 삶은 내 의지와 무관하게 또 새것으로 교체되어야 했다.

 한국에 와서 반년 정도 여러 가지 절차들을 해결하고 집중적으로 한국말을 익힌 후, 이듬해 봄 이곳 학교에 진학했다. 모든 건 다 아저씨의 뜻이었다. 이제 계속 이곳에서 살려면 하루 빨리 완전한 한국인이 되어야 한다는 게 아저씨의 생각이었다. 그나마 그간 한국말을 열심히 공부해 온 게 여간 다행스럽지 않았다. 하지만 단단히 정신무장을 하고 갔음에도 첫날부터 높은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미국에서 다닌 학교들과는 외관도 분위기도 선생님도 학과목도, 모든 것이 너무 달라 멀미가 나는 기분이었다. 심지어 한 달이 지나도록 같은 반 녀석들과 말 한 번 제대로 섞지 못했다. 내가 한국말을 잘 못하는 것을 알고 다들 내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용기를 내어 먼저 다가가도 돌아오는 반응들은 대체로 심드렁하거나 아니면 조롱이나 적대감이 섞인 것들이었다.

 그렇게 1년 같은 한 달을 꾸역꾸역 살아 내던 어느 날, 정확히는 1994년 4월 9일 토요일, 내가 살던 시애틀에서 비보가 날아왔다. 토요일이라 일찍 학교가 파한 후 나는 시디를 사기 위해 곧장 종로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한참 음반가게와 서점을 구경하고 나니 어느새 5시, 이제 집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그때 나는 이어폰으로 AFKN 라디오를 듣고 있었는데 갑자기 청천벽력 같은 뉴스가 귓전을 때렸다. 미국 날짜로 하루 전인 4월 8일 아침, 그룹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이 자택에서 사체로 발견됐으며 사인은 자살로 추정된다는 뉴스였다. 커트 코베인은 펄 잼의 에디 베더, 사운드가든의 크리스 코넬 등과 함께 당시 나의 영웅들 중 한 명이었다. 나는 거기서 더 이상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그의 노래 Dumb을 들었다. 그때 내 머리 위의 하늘이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랗고 높았던 것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그날 밤 나는 침대에 누워 익숙한 너바나의 노래들을 듣고 또 들었다. 그러고 있으니 자꾸만 눈시울이 뜨거워지려고 했다. 단순히 나의 영웅을 잃었다는 상실감 때문은 아니었다. 커트 코베인처럼 자살 같은 걸 생각했던 것도 아니다. 스토커처럼 늘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히던 불안과 공포로부터 달아나고 싶었을 뿐. 아니, 사실은 그것들로부터 달아날 수만 있다면 자살도 꼭 나쁜 선택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견뎠다. 한국에서의 고등학교 생활이 전혀 순탄치 않았고, 그 후에도 몇 번의 고비들이 더 있었지만 결국 이렇게 살아남았다. 살아남기 위해서 서툰 한국말부터 악착같이 갈고닦았다. 소설이며 시, 신문, 잡지 등 온갖 종류의 글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냥 읽은 것이 아니라 마치 고시공부를 하듯 내가 모르는 어휘나 문장의 형태와 만날 때마다 용법을 익히고 일일이 수첩에 옮겨 적었다. 그렇게 쌓이기 시작한 수첩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에 17권, 대학을 졸업할 때엔 거의 40권에 육박했다. 심지어 2천 페이지가 넘는 국어사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통째로 세 번 정독했을 정도니까. 나는 발음 교정에도 무진 애를 썼다. 밤새 또박또박 소리를 내어 책을 읽은 탓에 아침이면 몸이 피곤한 것은 둘째 치고 목이 쉬어 말이 잘 나오지 않던 날들을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다. 비단 한국어 공부뿐만 아니라 그것이 나의 평화를 위한 일이라면 어디에든 기꺼이 혼신의 힘을 쏟곤 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내 삶이 안전한 것이 될 수만 있다면.

 이 세상 누구에게도 이런 내 과거에 대해 털어놓은 적이 없다. 수호 역시도 대강의 줄거리를 띄엄띄엄 알고 있을 뿐이다. 내가 일찍이 부모에게 버려졌고, 미국으로 입양되었고, 누나가 떠났고, 아저씨를 만나 한국으로 돌아왔고, 몇 년 전 아저씨가 돌아가셔서 지금은 다시 혼자라는 정도. 이를테면 그가 알고 있는 것은 살을 죄다 발라낸 뒤에 남은 생선의 뼈 정도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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