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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줄 Mar 24. 2016

1.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건
별과 별이 만나는 거야

나단 "내가 그곳에 나가는 게 정말 잘하는 일일까?"

 긴 세월 기다려 왔던 순간이 바로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하지만 두려움에 선뜻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정말로 그것을 기다려 왔던 걸까. 기다려 왔다고 믿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던 걸까. 뭐가 이토록 나를 두렵게 만드는 걸까.

 "또 그 소리냐? 용기 있는 일이래도."

 수호가 핀잔을 주듯이 말했다. 용기, 이것은 내 인생에 가장 절실하고도 가장 부족한 덕목이 아닌가. 나는 용기가 필요한 일들이 두렵다. 처음부터 내게 결핍되어 있던 다른 많은 것들처럼 나는 용기마저 나를 낳아준 사람들로부터 물려받지 못했다. 물려받지 못한 건 당연하다. 그들은 둘째가라면 서러운 겁쟁이였을 테니까. 겁쟁이의 자식이 용사의 DNA를 갖고 태어날 수는 없는 법. 그렇다고 나의 부족한 용기를 모두 그들 탓으로 돌리려는 건 아니다. 물려받지 못했으면 스스로 키울 수도 있었을 텐데, 애석하게도 지금껏 난 그런 일들을 충분히 성취해 내지 못했다.

 "만나는 게 정말 바람직한 일일까?"

 나는 같은 것을 표현만 조금 바꿔서 다시 물었다. 계단에 앉아 신발 끈을 묶던 수호는 바삐 움직이던 긴 손가락을 멈추고 나를 바라봤다.

 "야, 어떻게 될지는 아직 모른다니까? 아니, 여러 번 말했지만 솔직히 그건 불가능에 가까워. 근데 넌 거기에 나가면 꼭 만나게 될 것처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어."

 예상한 대답이었다. 이 상황에 대한 가장 현실적인 분석이라는 것을 나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나는 내가 느끼는 이 불안을 변호하고 싶었다.

 "그래. 그렇지만 나로선……."

 "알아."

 기다렸다는 듯이 그가 내 말을 잘랐다.

 "잘 알아, 그래도 긴장될 수밖에 없다는 거. 사실 짐작했던 것보다는 너 지금 꽤 침착해. 이만 하면 무지 침착한 거야. 그러니까 일단 가 보자. 나랑 지준이가 네 옆구리에 철썩 붙어서 같이 가준다잖아? 잔말 말고 어서 나와."

 운동화 끈을 다 묶은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쿵쿵, 공기 중에 울리는 녀석의 발소리. 웬일인지 난 그 소리에 번쩍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때때로 수호의 이런 사소하고 무의미한 행동들조차도 내게는 무시하지 못할 어떤 위력을 발휘하곤 했다. 잠에서 깨어난 내 배짱이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그래, 겁낼 일이 아니야. 뭣 때문에 겁을 내? 어차피 수호 말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절대적인데. 체, 이까짓 거.

 어울리지 않게 돌연 용기백배해진 나는 짐짓 담대한 걸음걸이로 계단을 내려갔다. 수호는 벌써 시동을 걸어 놓고 나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쏟아지는 오후의 빛살이 녀석의 머리카락을 물들였다. 봄날 오후의 뭉클한 온기가 내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수호 운전대를 잡자마자 감기약이라도 먹은 것처럼 정신이 몽롱했다. 지구 온난화의 탓인지 일시적인 고온현상인지 3월 초부터 벌써 완연한 봄날 오후가 거리 전체에 무성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파란 불이야."

 나단이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액셀을 밟았다. 나는 흐리멍덩한 감각을 깨우려고 창밖의 햇살들을 노려봤다.

 "어떤 사람들이 나올지 궁금하다. 좀 멋진 사람들이면 좋겠는데."

 녀석은 태연함을 가장한 채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 속에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얼마나 떨고 있을지 안 봐도 훤했다. 그런데 만일 오늘 그 기적 같은 만남이 정말로 이루어진다면? 나는 어쩐지 그 다음의 일이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반대로 그 만남이 역시나 무위로 끝날 경우엔? 그래서 혹시라도 지난 상처들만 더 도지게 만든다면?

 어렵다. 이런 종류의 일들은 대처하기 곤혹스럽다. 단순히 옆에서 지켜볼 뿐인 나에게도 뭔가 아주 중요한 역할이 주어진 듯한 기분이다. 이를테면 헤비급 챔피언 타이틀에 도전하는 나단이의 프로모터가 된 기분이랄까. 사실 나단이가 안절부절 못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녀석의 소심함으로 말하자면 왕년의 핵주먹 마이크 타이슨이 옆에서 재채기만 해도 거품을 물고 기절하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찌뿌드드한 기분에 커피가 마시고 싶어 나는 한 편의점 옆에 차를 세웠다.

 "왜?"

 "가서 커피 좀 사오라고."

 지갑을 꺼내려고 하자 나단이는 자기가 사겠다면서 냉큼 차 밖으로 튀어나갔다. 졸린 눈으로 얼없이 녀석의 뒷모습을 좇는데 순간 살망한 주름스커트를 걸친 한 늘씬한 여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미인이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내 눈길은 그녀에게 붙박였다. 동공이 확장되는 것을 느꼈다. 삽시간에 그녀는 커피 한 잔 이상의 각성 효과를 내게 불어넣어 주었다. 알지도 못하는 그녀가 내게 커피 한 잔을 산 것이나 마찬가지니 나도 응당 그녀에게 커피나 식사를 대접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봄인 거냐? 연애가 하고 싶은 거야?

 2년 가까이 휴관 중이던 나의 연애극장이 긴 리모델링을 끝내고 방금 셔터를 올린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시 차에서 내리기는 귀찮았다. 그렇게까지 할 의향은 없었다.

 다시 창밖을 보니 여자는 그새 사라지고 없었다. 덜컥 차문이 열리고 나단이가 내게 커피를 건넸다. 


나단 "시디는 누구 거 살 거야?"

 시간이 일러 일단 우리는 홍대에서 시디를 사기로 했다. 내가 제안한 건데, 불안과 공포 속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일이 너무 끔찍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저녁까지 뭐라도 하면서 시간을 죽여야 그나마 마음이 다스려질 것 같았다.

 "글쎄. 넌?"

 "나도 정하고 가는 건 아니고. 사려고 들자면 한도 끝도 없잖아."

 수호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아, 날씨 좋다! 봄이 오는 소리가 요란도 하네!"하고 소리쳤다. 나는 녀석이 듣고 있다는 봄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보려다가 문득 이 차에 그득했던 소음이 확연히 줄어든 것을 알았다.

 "근데 이 차 오늘따라 무지 조용하다. 수리라도 한 거야?"

 "수리는 무슨 얼어 죽을. 얘가 원래 이랬다저랬다 해. 정신이 오락가락하나 보지."

 그는 한 달 전 기타를 판 돈 육십 만원으로 박물관에나 기증해야 할 것 같은 이 낡은 티코를 샀다. 주머니에 두 손 찔러 넣고 터벅터벅 쏘다니는 걸 하도 좋아하는 녀석이라 차를 산 건 조금 뜻밖이었다. 물론 차가 생기고 보니 여러 가지로 편리한 점들이 많았다. 

 "그나저나 기타 다시 사야지?"

 "있는데 뭘."

 "에? 그 기타로 계속 연주하겠다고? 그건 완전히 연습용이잖아? 상태도 그렇고."

 수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봤다. 그리곤 손가락으로 자신의 차를 가리키며 말했다.

 "얘 상태를 봐, 얘 상태를. 돈이 있음 얘부터 손봐야지 무슨 기타냐. 목숨 담보로 잡히고 좋은 기타 칠 일 있냐?"

 실제로 우리의 목숨이 위협받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이 차가 고물 중의 고물이라는 건 확실했다. 그의 말에 내 생각은 엉뚱한 샛길로 빠지고 말았다. 별안간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고물차라서 오히려 더 근사한 그림이 나올 것 같았다. 잠시 해안도로를 달리는 상상을 했다. 창밖에 드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나는 내 상상을 실현시키고 싶었다.

 "언제 이 차 끌고 바다나 보러 가자. 남쪽이든 서쪽이든. 아니, 이왕이면 남쪽이 좋겠다."

 "글쎄다. 얘가 바다까지 갈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가다가 중간에 폐차장 가야 되는 거 아냐?"

 녀석은 낄낄거리며 웃었다.

 "거 봐, 그럴 거 왜 샀냐?"

 "농담이야. 설마 바다까지 못 가겠냐? 이 코딱지만 한 나라에서. 가긴 가겠지. 근데 돌아올 땐 버스 타고 와야 될지도 몰라."

 녀석은 혼자서 또 폭소를 터뜨렸다. 그렇게 그의 대답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곳으로 사라졌다. 나도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그는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우왕좌왕하듯 고개를 내밀던 담배 연기가 다음 순간엔 득달같이 창밖으로 빠져나갔다.

 나는 뒷좌석에 마구 널려 있던 몇 장의 시디 가운데서 벨 앤 세바스챤의 음반을 집어 들었다. 그나마 수호가 카오디오를 바꾼 덕에 우리는 이 고물차 안에서 시디를 듣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창문을 활짝 열어 봄바람을 유인했다. 스피커에선 It Could Have Been a Brilliant Career의 은은한 선율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짝짓기라도 하듯 노래와 봄바람이 교태롭게 뒤엉켰다.


수호 주최자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지만 모임의 분위기는 그런대로 화기애애한 편이었다. 여덟 명의 사람들은 알아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지준이는 어느새 옆에 앉은 여자와 말을 튼 상태였다. 아니, 이미 신혼부부처럼 곰살갑게 떠들고 있었다. 나는 어쩌다 보니 잠시 사람들에게 우리 밴드를 소개하는 역할을 맡게 됐다. 사람들은 밴드 멤버 전원이 이 모임에 참석했다는 사실을 알고 웃었다. 내가 봐도 이건 마치 밴드 홍보를 위해 온 듯한 모양새였다.

 사람이 더 올 것 같지는 않았다. 문제는 오늘의 주인공이 여태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자기가 만든 모임에 첫날부터 지각이라니. 그것도 벌써 사십 분째. 대체 얼마나 얼간이 같은 녀석일지 호기심이 일었다. 설마 이러고 안 나타나는 최악의 머저리는 아니겠지? 나도 모르게 내 이성적인 판단은 그를 그냥 모르는 사람일 거라 전제하고 있었다. 내가 이런 전제를 깔고 있다는 것 자체가 왠지 나단이에게 미안했다. 물론 나도 기적이 이루어지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기적을 믿기에 나는 지나치게 현실적인 놈이었다. 앞가림이라고 해야 하나, 정작 내 인생을 꾸려나가는 일 같은 데에는 전혀 현실적이지 않으면서 나는 원래 이런 일에만 현실적인 놈이었다.

 화장실에 다녀오니 나단이가 방금 입수한 뉴스를 부리나케 내게 전달했다.

 "곧 도착한대. 가게로 전화 왔었어. 조금만 더 기다려 달래."

 "정체는 아직 모르고?"

 "응. 주인아저씨가 그 얘기만 전해준 거야."

 나단이는 나를 바라보며 억지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살며시 입술을 떠는 게 보였다. 내가 해줄 말이 없었다. 운명의 순간이, 혹은 그저 아무 것도 아닌 시시한 순간이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녀석은 과연 잠시 후, 누나를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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