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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aumazein May 14. 2023

나를 뒤흔든 세상의 문장들 10

삶의 최전선에서 살아 숨 쉬는 은유작가의 글쓰기의 최전선

#싸울수록_투명해진다  #다가오는_말들

로 이미 은유작가의 팬이기는 했지만

최근 읽은 #글쓰기의_최전선 

첫 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들숨과 날숨을 몇 번이나 몰아쉬게 하며 나를 현혹했고 감탄하게 했다.


억눌러있던 글쓰기에 대한 욕구를

무작정 불러일으키면서도

쉽게 쓰이는 글은 없다며 혹독하게 엄포를 놓기도 했다.


좋은 문장을 발견했을 때

사진으로 우선 저장해 놓는 습관이 있는데

어쨌거나 글머리부터

나는 이미 거의 모든 페이지를 찍고 있었고,

글머리가 끝날 때쯤에는 이러다간 모든 페이지를 다 찍어서 휴대폰에 저장할 수는 없겠다 싶어

기억하고 싶은 문장이 나올 때마다 내 목소리로 녹음하고 바로 텍스트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옮겨 쓴 메모장이 총 29페이지나 되었다.

이토록 폭넓게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은

은유 작가가 나와

정서의 결이 비슷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좋은 글을 발견했을 때의 그 짜릿함이란

우연히 들어간 식당이 타고나게 내 입맛에 딱 맞는 맛집이었을 때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애피타이저부터 본메뉴는 물론

후식까지 아주 흡족하게 흡입한 나는

기록으로 남기지 않을 수 없겠다 싶어

1여 년 만에 다시 브런치에 접속했다.


사실 책을 읽다 보면 그저 독자를

하나의 책 읽는 대상으로 소비하는 책도 있나 하면

어느새 시간과 공간이 되어 내 안의 샘을 솟아나게 하고

나만의 씨앗을 영글게 하여 싹 틔우게 하는 글이 있다.


아마도 그런 글을 탄생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한 작가의 시간이

책을 통해 나에게 와닿은 것이리라.

좋은 글은 그렇게 시공간을 떠나 공명되고 울림을 준다.

수많은 단어와 문장들을 메모장에 다 기록했지만,

특히나 가장 기억에 남는 한 단어만 먼저 꼽자면 이것이다.


감응     


무엇에든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자가 어디에도 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법이다. (18)


누구나 앞다퉈 자기의 영향력을 끼치려고만 하는 판에서

한 발 물러나

'나는 왜 아직도 이것저것 보고 잘 반하기만 할까'를 고민하던 중

그런 감응력이야말로 영향력 전에 꼭 가져야만 하는

하나의 타고난 재능임을 보고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나를 반하게 하는 것이 내게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나 또한 그런 수많은 물결에 휩쓸리고 빠지기도 하다가

다시 누군가에게 어떤 물결로, 어떤 파도로

감응을 줄 수 있을 테니.

"잘 반하는 것도 능력이고 무엇에 반하냐가 관건이다."

라고 작가가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은유작가는 한 권의 책 전체로

내게 말을 걸고 나를 감응시켰다.

 


내 말은 (상대)가 듣고 싶은 말로 접수되면서 의미가 변질되었다. 왜 그럴까.

사람들은 어떤 말을 '합리적 인식'이 아

'자신의 정서'로 판단했다.

자신이 이해하면 선이고 불편하면 악으로 취급했다.

조직에서는 다수가 지지하면 선이고

소수가 주장하면 악이 되는 구조였다.

더러 소통대란을 겪을 때마다 나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우주의 섭리를 해명하는 일처럼 막막했다.

과연 나의 판단은 옳은 것인가 헷갈렸다.

아니라고 생각하는 걸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

그렇다면 서로의 차이는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

삶이 굳고 엉킬 때마다 글을 썼다. (9)


글보다는 말로 표현하는 것이 늘 서툴고 어려운 나는

대개는 대화를 조심하려고 했지만,

누군가와의 갈등이나 오해의 시작은

결국 말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떻게 하면 말로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아무리 고민해도

그런 고민 끝에 건네는 말 또한

또다시 더 엉키고 설키게 하는 때도 있었다.

그래서 나와 다른 상대를 이해시키는 것보다는

그저 내 안의 감정의 서사와 사고의 물리를

다시 정리해 보는 쪽이 더 낫겠다는 결론으로 마무리되었고,

거기에 글쓰기가 때로는 큰 해결책이 되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쓰는 것이 잘 쓰는 것일까.

내 안에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실타래를

어떻게 선명하면서도 아름답게,

때로는 불편해도 명징하게 보여줄 수 있을까.



'왜'라고 묻고 '느낌'이 쓰게 하라.

...

사회 구조적인 매트릭스에서 자신을 분리시킨 채

성급한 반성과 화해, 자기 정당성 확보에 글쓰기로

잠시 위안받고 산뜻하게 일상으로 복귀하는 게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해, 그 삶에 대해, 이 세상에 대해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면서 조금씩 불편해지며 깨어있는 게 목표라면 목표였다.

...

한 사람이 인도하는 진리를 묵묵히 따르는

조용한 수업이 아니라

온갖 삶이 마주치고 느낌이 발생하고 생각이 대결하는,

존재가 춤추는 시간인 것이다. (32)


작가의 글을 읽으며 당장 잘 쓸 자신은 없지만

어떤 글을 읽을지는 조금씩 뚜렷해졌다.

내가 읽고 소화한 글들이 내 속으로 잠식되었다가

나를 통해 새로이 글로 발현되고

또 그 글들이 나를 다시 구성할 것이라 생각되니

애초에 글도 유심히 '잘 골라'

'잘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좋은 글은 질문한다.

선량한 시민, 좋은 엄마, 착한 학생이 되라고 말하기 전에

그 정의를 묻는다.

좋은 엄마는 누가 결정하는가, 누구의 입장에서 좋음인가,

가족의 화평인가, 한 여성의 행복인가.

때로 도덕은 가족, 학교 등 현실의 제도를 보호하는

값싼 장치에 불과하다.

일상의 평균치만을 관성적으로 고집하며 살아가는

순치된 개인을 길러낸다.

하지만 평균적인 삶도 정해진 도덕률도 없다.

천 개의 삶이 있다면 도덕도 천 개여야 한다.

자기의 좋음을 각자 질문하면서

스스로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힘을 갖는 게 중요하다.

작가는 그것을 촉발해야 한다.

삶에 존재하는 무수한

"차이를 보편으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로부터 기존의 보편을 끊임없이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글이 생명력을 갖는다.

내가 쓴 글이 숨 막히는 세상에

청량한 바람 한 줄기 위안이 되는 것도 좋지만,

사막을 옥토로 만들 물음의 씨앗을 품고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질문하는 글'은 '생성하는 삶'으로 이어진다.

왜라고 묻는 글,

자신을 다양한 존재로 개방하도록 등 떠미는 글,

도덕 위에서 춤추도록 깨달음의 오르가슴을 선사하는 글,

모든 글(책)의 최종 목적은 '감동'이다.

그리고 진정한 감동은 신체가 바뀌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이다. (119)


전체 글 중에서도 무언가 내겐 칠면서도

가장 힘 있게 와닿은 문단이다.

내가 지금까지 '청량한 바람 한 줄기' 같은 글을

쓰려하지 않았나 의심도 생기었다.

작가는 분명 온 힘을 다해 우아한 내적 분노로

이 글을 썼을 것이라 확신되었다.


은유의 문장은 삶의 파도와 고뇌의 뿌리,
그리고 사색의 절벽에서 가까스로 매달려 길어 올린 정수, 아니 약수 같았다.


내가 왜 글을 쓰려고 하는지, 글을 잘 쓰고 싶은지,

글을 쓴다는 것은 내게 어떤 의미일지

다시 고찰해 보게 되었다.

한 번 기분 좋게 읽고 잊어버리는 글이 아닌,

쓰고 더라도 나와 너를 더 성장시키고 성숙하게 하는,

또는 뇌리에 박혀 잊히지 않는,

그런 도끼 같고 약이 되는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스스로 돌아봄과 나의 만족에 그치는

자조적인 글쓰기를 했다면

나와 내 삶을 세상이라는 거대한 거울에 비춰 보고

그 거울을 통해 스스로를 맞닥뜨리고 응시할 수 있는 힘과

자기 한계와 삶의 경계를 돌파할 수 있는 힘을 가지는,

그리하여 독자까지 감동시키고 감응하게 하는  

살아 숨 쉬글을 쓰고 싶어졌다.  


나는 그런 글을 탄생시킬 수 있을까.

글쓰기가 나를 그런 삶으로 데려가줄 수 있을까.


그러자면 나는 스스로 내 삶을 더 솔직하게 파고들고,

날 것으로 드러낼 용기를 먼저 가져야함을.



작가는,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언어로 세공하고 두루 나누면서 세상과의 접점을 넓혀가는 사람이다.

'어떤 글을 쓸 것인가'하는 물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탄탄한 문장력은 그다음이다.

열심히 잘 쓰려고 노력해야 하지만

그 '열심'이 어떤 가치를 낳는가 물어야 한다.

밤이고 낮이고 온 국토를 삽질하는 게 '발전'은 아니듯 자신을 속이는 글, 본성을 억압하는 글,

약한 것을 무시하는 글, 진실한 가치를 낳지 못하는 글은 열심히 쓸수록 위험하다.

우리 삶이 불안정해지고 세상이 더 큰 불행으로 나아갈 때 글쓰기는 자꾸만 달아나는 나의 삶에 말 걸고,

사물의 참모습을 붙잡고, 살아 있는 것들을 살게 하고,

인간의 존엄을 사유하는 수단이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23)  


글머리의 마지막 이 문단은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재촉했다.

나라는 우주 안에 얽히고 설킨 카오스를

세상을 통해 겪게 하고 풀어내고 그렇게 접점을 넓혀서

다시 더 큰 우주와 공존하게 하는 것.


그것이 내게는 글을 읽고 쓸 이유이며

앞으로도 계속, 느려도 꾸준하게 해 볼 작정이다.


글을 쓰는 시간이 내게는 

때로는 두렵기도 하지만

'자기 한계와 욕망을 마주하는 계기이자

내 삶에 존재하는 무수한 타인과 인사하는 시간'이고

너의 삶에도 말을 걸고 서로 감응하는 악수이며

''독립하되 고립되지 않는 삶'의 미학을 실천하는

절대 놓칠 수 없는 과정'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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