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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준현 Sep 06. 2020

그릭요거트

묵직하고 산뜻한, 한 입의 기쁨

요거트는 내게 평등한 음식이다. 빈부, 직업의 여부와 상관없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뚜껑부터 핥아먹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어릴 적 내가 가장 처음 접한 요거트는 요플레였다. 어머니는 장 건강에 좋은 건강음식이라는 이유로 집에 요플레를 항상 구비해두셨는데, 하루에 한 두 개 씩 냉장고에서 꺼내먹곤 했다. 학창 시절엔 딸기, 블루베리 등이 섞인 과일맛 요거트를 자주 먹다가 이십 대가 넘어가면서 플레인 맛을 더 선호하게 되었다. 깔끔한 순백색의 비주얼과 정갈한 맛에 끌렸다. 특히 뚜껑과 패키지 가장자리에 붙어있는, 적당히 응고된 부분을 좋아했다. 어쩌면 뚜껑에 붙어있는 별미를 느끼려 요거트를 찾았던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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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 대까지만 해도 내게 요거트는 사각형 패키지에 담긴 되직한 액체를 떠먹는 이미지로 남아있었다. 그러다 서른, 새해를 맞아 떠난 여행에서 내 입맛에 꼭 맞는 요거트를 만났다.


"왜 그리스에 가요?"

두 번째 유럽여행의 목적지를 그리스로 정했다고 하자 주변에서 가장 먼저 들은 질문이다. 프랑스, 영국, 독일, 이탈리아 등을 자주 찾는 우리나라에서 그리스는 생소하고 왜 가는지 궁금한 곳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한 때 미술학도였던 나는 서양 미술사의 근원으로 꼽히는 파르테논 신전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수 천년의 세월을 버틴 고대 유산들을 보고 옛 정취에 취하고,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로 유명한 델피 신전에 들러 내 미래를 점쳐보고 싶기도 했다. 파란 하늘 아래 빛나는 아름다운 섬의 풍경도 즐기고 싶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여행 계획을 세우며 꼭 먹어보아야 하는 음식 목록도 만들었다. 그리스 음식을 떠올리면 올리브와 각종 해산물 등 신선한 재료로 만든 건강한 식단이 연상되는데, 그중 그릭 샐러드와 그릭요거트가 특히 기대되었다. 얼마나 맛있고 특별하면 메뉴 이름에 국가명이 붙었을까 궁금했다.

그리스에서 먹었던 그릭요거트들. 꿀을 얹은 요거트에 과일, 견과류 등을 곁들여 먹으면 행복 그 자체를 느낄 수 있다.

여행 첫째 날은 시내를 돌아다니고, 둘째 날은 아테네 반나절 투어에 껴서 도시의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식사 때가 되면 메뉴에서 그릭요거트를 찾아보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다 여행 셋째 날,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작정하고 요거트 전문점인 Fresko Yogurt Bar에 찾아갔다. 3유로 정도를 내고 직원이 추천하는 꿀과 견과류 토핑을 얹은 메뉴를 주문한 후 설레는 마음으로 작은 컵을 받았다. 외견은 꼭 배스킨라빈스의 컵과 비슷해서 요거트라기보다 아이스크림 같기도 했다.


꿀과 견과류 조각이 가득 들어간 요거트를 한 스푼 떠서 입에 넣은 순간, 유레카를 외쳤다. 왜 이때까지 이 맛을 몰랐을까. 꾸덕꾸덕한 크림치즈 같은 식감, 살짝 시큼한 요거트와 고소한 견과류, 진하고 달콤한 꿀의 조화는 정말이지 신의 한 수였다. 노상에 펼쳐진 테이블 앉아 흥겨운 음악을 들으며 혼자 요거트를 먹는데 아침의 찬 공기가 더욱 상쾌하게 다가왔다. 절로 콧노래가 나오고 어깨가 들썩였다.


그 후 그리스 여행 내내 기회가 되면 그릭요거트를 먹었다. 하루에도 여러 번 먹는 바람에 장 운동이 촉진되어 소화에 막힘이 없었다. 수분 기가 없는 단단한 질감의 요거트 위 진한 맛의 꿀을 아낌없이 얹은 것이 기본 메뉴이고 여기에 취향껏 토핑이 올라가는데 딸기, 바나나, 사과와 같은 과일 또는 호두, 피칸과 같은 견과류가 가장 흔한 조합이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낙소스 섬 동네 식당인 Maro's taverna에서 먹은 요거트다. 커다란 대접에 투박하고 넉넉하게 담긴 그릭요거트에서 시골의 인심을 느낄 수 있었다. 한 대접에 5천 원 정도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 한 그릇만 먹어도 배부른 한 끼를 먹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토핑을 얹어 먹든 과일에 곁들여 먹든 언제나 맛있는 그릭요거트 (집밥 인스타: yujieater)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그릭요거트를 찾았으나 쉽게 발견할 수 없었다. 그리스 음식 전문점이 흔치 않거니와 마트에서 파는 요거트는 대부분 묽은 질감의 유청이 들어간 것으로, 정통 그릭요거트를 먹으려면 인터넷에서 주문해야 했다. 가격을 알아보니 만만치 않았는데 500g 한 통에 만 오천 원 정도로, 그리스 음식점에서 한 대접에 4-5천 원 하던 것이 한국에서는 두세 배의 가격이 되어있었다. 접근성이 떨어지고 값이 꽤 나갔지만 꾸덕하고 촉촉한, 부드럽고도 묵직한 그릭요거트가 주는 기쁨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도 한 달에 1-2리터 분량의 그릭 요거트를 소비하고 있다.


그릭요거트는 꿀과 견과류 또는 과일을 얹어 먹는 것이 정석이라지만 각종 베리, 시나몬, 카카오닙스, 대추야자 그 어느 것과도 잘 어울린다. 이때 꿀의 선택이 중요한데 아카시아 벌꿀 등 꽃향이 진한 꿀과는 안 어울리며, 마누카 꿀, 밤꿀 등 진하고 고소한 맛이 나는 꿀과 조합이 좋다. 과일에 소량 얹어먹거나 빵에 크림치즈 대신 발라먹어도 맛있다. 아이스크림과 질감이 비슷하니 살짝 얼려서 젤라토처럼 먹어도 좋다. 또한 그릭요거트와 다양한 치즈를 섞어 먹으면 더욱 크림치즈와 같은 풍미를 느낄 수 있다. 마스카포네 치즈를 그릭요거트에 살짝 섞어먹어 봤는데 버터 향과 크림치즈 향을 느끼면서 요거트의 상큼함을 그대로 맛볼 수 있어 별미였다.


아침으로 먹거나 후식 또는 오후 간식으로 먹기 안성맞춤인데, 식사에 그릭요거트를 더하면 아주 고급스러운 후식을 먹은 기분이 든다.

어느 하루를 고급지게 만들고 싶다면, 한 입 음미하며 잔잔한 기쁨을 느끼고 싶다면 묵직하고도 산뜻한 그릭요거트 한 술 떠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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