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시간을 기억한다. 그 말을 스무 살 무렵의 나는 몰랐다. 오분 단위로 맞춰놓은 열 두 개의 알람도 내 육체에 시간을 새기진 못했다. 새벽녘까지 남자친구와 메시지를 주고받다가 스르륵 잠이 들었고, 열한시쯔음 무겁게 닫힌 눈꺼풀의 아래까지 찌르는 햇살에 못 이겨 일어나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런 일상이 더 이상 일상이 아니게 된 건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부터였다. 낮밤이 뒤바뀐 생활을 일 년쯤 지속하고 보니, 몸은 지금까지의 패턴을 초기화시켰다. 까무룩 잠들고 느지막이 일어나던 그 축적된 삼십 년의 생활을 고작 일 년이 바꿔놓았다. 그 후로 내 몸에는 시간이 새겨졌다. 오전 일곱 시만 되면 눈이 떠졌고, 오후 아홉 시 반만 되면 눈이 감겼다. 휴대폰에 알람을 맞추지 않고 생활한 지도 벌써 육 년이 넘었다. 가끔 ‘내가 이렇게나 부지런하고도 규칙적인 사람이었던가?’하고 놀라기도 한다. 곧 아이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말간 눈동자가 보였다. 새로운 아침을 맞이한, 또 다른 세상을 마주한 아이의 눈동자에 내가 비추는 것이 보인다. 아이는 결코 내 눈을 피하는 법이 없다. 그저 빠안히 나를 쳐다보고, 인식하고, 받아들이고 이내 반가움에 인사를 건넨다. “굿모닝. “ 그 인사를 들으며 생각에 잠긴다. 많은 손님들이 나를 두고 부지런하다고, 열정이 가득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네들이 바라본 내 모습은 불과 육 년 전에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 매일 일곱시쯔음 일어나는 아들이 기상 알람이 되었고, 유치원 등학교 시간에 맞춰 촘촘히 쌓인 나의 스케줄이 열정으로 둔갑했다. 이십대의 마냥 낙관적이고 게으름이 용납되던 단독의 시대가 송두리째 뒤흔들렸다. 그 흔들림은 지금껏 내가 다져온 콘크리트를 갑자기 푹 꺼드리며 거대한 구멍을 만들어냈다. 싱크홀에 휘말려 떨어진 나는 공포에 좌절한 순간도 있었으나, 덕분에 지반 밑에 숨겨진 새로운 세상, 즉 새로운 나를 발견한 셈이었다.
요 근래 육체에 새로 새겨진 시간이 있었는데, 바로 새벽 세시다. 그것도 계절을 타는 시간으로, 매년 여름마다 새벽 세시에 눈이 떠졌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세시에 눈이 떠졌다. 자기 계발이나 운동을 위한 미라클 모닝은 아니다. 내가 일어나는 이유는 고작, 에어컨을 끄기 위해서다. 더 이상 선풍기로도 견디지 못할 만큼 무더위가 계속되자, 우리 가족은 에어컨을 켰다. 땀을 세 줄기씩 흘리는 아들이 큰 이유였다. 이맘때쯤 아이들은 온 피부로 열기를 내뿜곤 하는데, 가만있지 못하는 육체 때문에 열기가 가라앉을 틈이 없었다. 에어컨을 틀었음에도 시큼한 땀냄새를 풍기는 아들의 이마를 한 번 쓰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버거운 눈꺼풀을 겨우내 뜨고서 창문을 열었다. 남편이 누워있는 곳과 아이가 누워있는 곳의 거리를 대충 가늠해 선풍기를 위치시키고 회전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나서야 나는 다시 내 자리에 누웠다. 그런데 한 번 떠진 눈은 좀처럼 감기 어려웠다. 나는 하릴없이 인스타그램이며 숏츠를 넘겨보다가 스르륵 잠이 들었다. 그리고 이 패턴이 여름의 일상이 되었다. 새벽 세시에 깨고, 다섯 시쯤 겨우내 잠이 들고, 일곱 시에 일어나는 일상. 그 일상이 반복되니 여름철만 되면 피로도가 높아졌다. 여느 때와 같이 아들이 시리얼을 먹는 동안, 나는 화장대 앞에 앉았다. 파운데이션으로도 잘 가려지지 않는 눈 밑 침침함을 가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거울 속 내 모습에서 기어코 나는 엄마를 보고야 말았다.
에어컨은 없고 선풍기만 있던 그 시절, 우리는 과학보다는 미신을 믿었다. 선풍기를 틀고 자면 죽는다는, 그러니 꼭 선풍기를 끄고 자야 한다는 말을 진심으로 새겨듣던 시대였다. 그 당시 오래된 선풍기에는 예약모드가 없었다. 심지어 선풍기도 한 대였다. 우리는 거실에 나란히 누웠다. 어린 나는 투정을 부리곤 했다. 제일 끝에 누워있어서, 선풍기 바람을 맞을 수 있는 시간이 짧다는 이유였다. 선풍기를 요리 바꿔보고, 저리 돌려봐도 더운 건 매한가지였다. 간헐적으로 느껴지는 선풍기의 산들바람이 겨우내 나와 남동생을 재우곤 했다. 그렇게 한참 정신없이 자다가 간혹 엄마의 손길을 느낄 때가 있었다. 내 얼굴 위로 엄마의 콧김이 느껴지고, 키득거리며 나와 남동생을 바라보던 시선이 눈꺼풀 너머로 느껴졌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이 엄마의 손등에 닦이고, 사각거리는 촉감이 이마와 머리에 머물던 순간을 나는 잊지 못한다. 손바닥의 마찰이 주는 안락에 까무룩 잠이 들면, 다음날 아침이 찾아오곤 했다. 아침마다 꺼져있던 선풍기, 그 당연한 풍경이 이제는 누군가의 눈 밑 침전과 맞바꾼 것임을 안다. 나와 남동생을 한쪽으로 몰아놓고, 그쪽으로 선풍기 머리를 더 돌려놓았던, 그럼으로써 오랫동안 선풍기 바람을 쐬었지만 죽지 않고 살아있는(?) 이유를 이제는 안다.
나는 거울 속 엄마의 한 시절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선풍기 바람을 오래 쐬면 죽는다던 미신이, 에어컨 바람을 오래 맞으면 죽는다는 믿음으로 바뀌어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분명 미신임을 알고 있음에도 과학보다 더 진실이자 진리가 되어버린 그 말. 세대를 이어져 전해지는 이 말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어쩌면 만에 하나 그런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는 염려, 그 바보스럽고 멍청해 보이는 사소한 걱정의 바탕에는 애정이 있었다. 사랑이 있었다. 엄마의 끊임없는 잔소리가 내 입에서 되풀이되고, 엄마가 나를 바라보며 내뿜었던 콧김이 내가 아이에게 부는 콧바람으로 이어지는 이 모든 일상의 근원에는 사랑이 있다.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인간의 근본에는 마음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