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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과의 연결, 묵은 감정의 계보

내가 스물 중반 무렵, 엄마에게 통장을 만들어 준 적이 있다. 그때까지 엄마는 이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는 이었다. 이 사회에서 ‘존재’는 곧 서류, 즉 기록으로 증명된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의 신용 기록이 존재, 그 자체였다. 주민등록등본 외에는 자신의 이름으로 된 그 무엇도 갖지 못한 엄마는 그야말로 없는 존재였다. 휴대폰부터 카드, 통장 그 모든 것이 아빠의 명의였으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세금 절세 효과가 있었고, 연말정산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에, 경제권은 남편이 쥐고 있으니까 그게 더 편리하다는 이유로 엄마는 자신의 존재를 지웠다. 비단 엄마뿐 아니라, 옆집에 사는, 아랫집에 사는 이모들도 그랬다. 그렇기에 그녀들은 시스템 안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전화번호 하나 없어 메일 계정도 만들지 못했고, 좋아하는 쇼핑몰에 회원 가입도 할 수 없었다. 그럼으로써 어떠한 새로운 도전도 할 수 없었던 수많은 엄마들을, 나는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정보화시대가 시작되며 컴퓨터 교육을 받았던 내게 이모들은 곧잘 찾아오곤 했었지만, 정작 나는 그 어떤 도움도 줄 수 없었다.


어찌어찌 취업에 성공하고 나서 월급이 두둑이 쌓았을 무렵, 나는 엄마의 손을 잡고 근처 은행에 방문했다. 얼마 되진 않지만 내가 가진돈 오십만 원을 묻어 엄마 명의의 통장을 처음으로 개설했다. 엄마는 코 묻은 돈 받아서 뭐 하냐고, 그 돈 모아서 네 결혼자금으로 보태라는 등 잔소리를 해댔다. 하지만 나는 엄마를 위한 일이 아닌, 나를 위해, 내 마음의 짐을 덜기 위해 한 일이었다. 시간이 흘러 아빠가 퇴직을 했다. 그제야 엄마는 자신 명의로 처음으로 휴대폰을 가입했다. 자신을 인증할 수 있는 휴대폰 번호가 생기자, 이메일을 만들고, 각종 사이트에 회원가입하는 일들이 쉬워졌다. ‘인증번호’가 뭐냐고 묻던 그녀가 인증번호를 직접 입력하기 시작했다. 숲해설사를 꿈꾸고 있던 그녀가, 자신의 이름으로 사이트에 회원가입을 하고 강의 신청도 했다. 그게 바로 작년, 2024년의 일이다.


나는 모든 것이 평등하다고 믿고 자란 세대다. 남녀차별이 어디 있는가, 똑같이 교육받았고 원하면 대학교 진학까지 부모님이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는 세대였다. 그렇게 믿고 살았건만, 가끔 다가오는 미묘한 순간들에 여전히 당혹한다. 아직까지 남녀 임금격차가 있다는 사실에 기가 막히고, 일자리를 구하는 내 친구가 임신적령기(?)라고 채용되지 못하는 현실에 좌절한다. 말로 할 수 없는 미세한 차별에 속이 울렁거리고 분노한다. 나이를 좀 먹었다고, 이제는 제법 세상에 자연스럽게 스며 들을 때도 있다. 분노를 삭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가끔씩 나를 건드리는 이 은근하교 묘한 차별들은 견딜 수가 없다. 도무지 참을 수 없을 때가 되면 그저 나불거리며 불만을 토해낼 뿐이지만. 이런 나를 두고 남편은 ‘넌 페미니스트잖아’라고 말을 한다. 그가 생각하는 페미니스트의 정의가 무엇 일진 모르겠다. 다만 대한민국에서 페미니스트를 생각하면 떠올리는 숱한 단어들은 그는 안 떠올렸으면. 제 나름대로 그 단어에 정의를 내렸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볼 뿐이다.


어렴풋하고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는 차별들이, 문득 설움이 되어 밀려오는 순간들이 있다. 나는 이 묵은 감정이 더 이상 다음 세대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엄마가 느꼈던 세상의 장벽이 내게는 설움이 되었다면, 그다음 세대에까지 축적되어 이어질 감정은 얼마나 끈적이고 무거울까. 그 한의 깊이를 내 가족은, 내 친구는, 내 아들은 겪지 않기를 바란다. 아들의 미래의 배우자, 친구들, 그리고 더 넓은 세상으로 가지를 뻗어갈 모든 이들이 그 고통을 느끼지 않기를 바란다. 단지 하나의 인간으로서 존중받으며 살아가기를 바란다. 그 마음을 두고 비난할 수 있는가. 오히려 당신도 내 손을 잡고 함께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당신의 엄마가 겪었고, 내 엄마가 겪었고, 지금의 내가 여전히 겪고 있는 이 현실을, 이제라도 제대로 직시해 주면 안 되는가. 어쩌면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누군가의 오래된 상처를 이고 사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이 고통을 직시하는 일은 과거의 끝을 긋는 동시에 미래의 시작을 여는 일이다. 나는 그 가능성을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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