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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 끝, 체념이 곁든 삶으로 내일을 살아간다


나는 지금 집 근처 한 학교 계단에 앉아있다. 가로등도 없어 어둠으로 까무룩 한 이 공간에서 잠시나마 몸을 위탁하기로 했다. 남편과 나는 시댁 식구들과 함께 가족모임을 하고 집으로 걸어오는 길이었다. 때마침 아이도 시댁에서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나는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술에 취했다는 명분으로, 때마침 아이도 없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그동안 속상했던 것들을 하나 둘 늘어놓았다.


대표적으로 시어머님의 운전 실력을 두고 시아버님과 남편이 잔소리를 하는 것이었는데, 내가 보기에 어머님은 제법 경력이 되시건만, 시아버님과 남편은 아직도 어머님께 그렇게 잔소리를 해댔다. 운전을 못하느니, 고속도로는 절대 못 타느니, 주차도 제대로 못하느니 등등. 어머님이 주차장에서 차를 빼내는 과정을 샅샅이 지켜보는 남편을 바라보며, 나는 어쩐지 이 행동이 배려라기보다는 무시로 느껴졌다. 당신을 믿을 수 없다고 보여주는 언행은 상대를 얼마나 위축되게 만드는가. 생전 잘하던 주차도, 못한다고 한마디만 들으면 그때부터 주차가 얼마나 삐뚤어지던지. 내게까지 이어지는 그 무시가 정말이지 견딜 수가 없었다. 게다가 시누이의 체격 가지고 온 가족이 잔소리를 하는 것도 어쩐지 불편했다. 그런데 그게 비난이 아니라, 가족사이에서 하나의 장난이 되어버렸다는 거다. 살을 빼려면 그만 먹어야 한다느니, 남들은 연애하면 살부터 뺀다던데 왜 시누이는 그렇지 않은지. 정작 시누이는 어떠한 타격도 없어 보였지만, 그 사이에 앉아있는 내 시선은 어디를 향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축 늘어진 내 뱃살을 바라볼 뿐.


대수롭지 않게 여겼거나 인내했던 부분들을 남편에게 용기 내 말했다. “가족 사이에 하나의 문화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지금부터라도 너는 안 그랬으면 좋겠어.” 가만히 듣던 남편은 기브엔 테이크 식으로 내게 요구한다. 너도 이러한 부분에서 이러지 마. 나는 그의 말을 인정하면서도, 꼭 이런 식으로 ‘너도’를 붙여야 할까, 그의 말투가 몹시 거슬렸다. 나는 토라진 마음에 그와의 거리를 두었다. 우두커니 서있는 나를 뒤로 두고 그는 저만치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면서 점차 우리의 거리는 멀어졌고, 결국 그는 코너를 돌아 사라져 버렸다. 텅 빈 거리에 혼자 남겨진 나는 잠시간 외로움에 사무치다가, 불을 반짝이는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편의점은 이런 부분에서 삶의 순간마다 위안이 되는구나 싶다. 집까지 걸어가는데 적어도 15분은 더 걸어야 하기에. 나는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기로 했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단 하나의 아이스크림이 아니라. 1+1이라던가 2+1 행사상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결국 팥빙수 두 개, 폴라포 두 개를 사들고 편의점을 나섰다.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뒤도 돌아보고, 좌우도 살펴봤지만 어디서도 남편은 보이지 않았다. 합리적인 선택이라면 남편 쪽에서 집에서 기다리는 것이 서로 엇갈리지 않고 좋을 것이다. 나 같아도 집에서 남편이 오길 기다리겠다 싶으면서도 내심 서운한 마음은 사무치기만 하다.


아이스크림이 든 봉지를 덜렁이며 집을 향하는 길, 집 근처 한 학교가 보였다. 학교로 이어진 계단은 어둠으로 드리워져있었다. 내 한 몸을 감쳐줄 수 있을 것만 같은 그 칠흑 속으로 나는 스르르 들어갔다.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생각했다. 남편에게서 시아버님의 모습이 보이고, 내게서 엄마의 부분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듣기 싫던 잔소리를 자식에게 되풀이하고, 닮기 싫었던 부모의 언행을 닮아가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나는 그 근본에는 우리가 부모보다 세대를 더 닮는다는 말을 떨칠 수가 없다. 당연한 듯 백그라운드가 되었던 여러 말들이 그대로 스며들어, 아무렇지 않게 일상에 드러나고 있는 건 아닐까. 당연한 듯 저녁밥을 차리고 있는 내 모습, 여자는 공간감각이 떨어져서 운전을 잘 못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한 그의 염려 섞인 잔소리들. 나를 괴롭히는 미묘한 이 순간들은 남편이라던가 시댁의 문제가 아니라, 대물림된 문화가 아니던가. 나의 세대도, 이 전의 세대도, 그 전의 세대도 느꼈던 공통점이지 않은가. 쭈그리고 앉아있는 콘크리트 계단의 열기에 아이크림이 녹아가고 있다. 한 시간 남짓 지났지만 남편으로부터 연락이 없었다. ‘나는 갈 곳이 집 밖에 없는데.’ 이 한마디가 거의 삼십 년 가까이 지난 과거의 경험을 불러일으켰다.


초등학생 무렵 엄마를 따라 집을 나간 적이 있었다. 아빠와 어떠한 이유에서 언쟁을 높이다, 엄마는 무턱대고 집을 나섰다. 물러설 곳이 집안이 아니라, 집 밖이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나는 울먹이며 엄마를 따라나섰고, 그런 나를 두고 엄마는 몇 번이고 소리쳤다. “집으로 돌아가!” 엄마가 없는 곳, 분노로 화를 삭이는 아빠가 있는 곳이 내게는 안식처일 수가 없었다. 집 외에는 갈 곳이 없던 엄마가 어디로 사라져 버릴지, 나로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우는 엄마 뒤를 무작정,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따라 걸었다. 나를 외면하기 힘들었던 엄마는 좀 더 울지도 못한 채 나를 데리고 모텔로 데려갔다. 숙박비를 결제하는 그 카드는 아빠가 주었던 카드였다. 멈칫한 엄마의 손길이 느껴졌지만, 엄마는 나를 돌아보며 그렇게 하루치 숙박비를 결제했다. 나는 그때 어렴풋이 생각했다. ‘내가 없었다면 , 엄마는 아빠 카드를 빌어쓰며 비굴하지 않았어도 됐을 텐데.’ 그렇게 들어간 숙소에서는 남성과 여성이 뒤섞이며 내는 소리가 노골적으로 들려왔다. 흐느끼는 섹스소리에 나는 비참함을 절로 느꼈다. 엄마는 이불깃을 입에 집어넣으며 울었다.


그때 엄마의 감정을 나는 콘크리트 계단에서 느끼고 있다. 먹지도 않을 아이스크림, 녹아가는 그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두 손으로 쥐며 울부짖고 있다. 그의 카드로 산 아이스크림, 그에게 날아갈 카드사용문자, 그것들이 한없이 나를 초라하게 만들어 울고 있다. 나는 내 감정을 갈무리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집으로 가는 길 하나 있는 횡단보도를 건너며, 혹시 내가 차에 치여 죽으면 남편은 어떻게 생각할까 뜬금없는 생각을 해본다. 빈자리를 크게 느끼려나? 하지만 그 이전에, 고작 남편의 반응을 보고자 죽음을 선택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나를 위해 살고 있다고 믿고 싶었다. 남편 명의로 된 집, 남편 명의로 주택담보대출을 받은 집으로 돌아오는 이 길이 비굴이 아니라고, 나도 가계에 한몫하였고, 그러니 당당히 집에 들어갈 권리가 있다고 울부짖으며.


남편도 결국 타인이라는 사실, 재정적으로의 독립이 진정한 독립이라는 그 상투적인 말을 끝내 인정하고 싶지 않다. 가족이기에 더 잘해주고 싶고, 내가 가진 것을 기꺼이 내주고 싶은 이 마음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 않은가. 타인이라기보다 나와 같은 동일시된 존재로 여겨지는 게 바로 가족이 아니던가. 몇 시간의 방랑 끝 나는 집으로 걸음을 옮긴다. 남편은 뭘 하고 있을까? 왜 이렇게 집에 빨리 안 들어오나 걱정하려나? 아니 그보다는 술에 취해 드르렁 코를 골며 소파에서 자고 있으리라. 그의 모습이 눈앞에서 그려진다. 나는 그럼에도 서러움을 떨쳐낸 채, 남편과의 싸웠던 순간이 없었던 것처럼 외면한 채, 그래도 남편이 제법 집안일이나 아이육아도 적극적으로 도와준다고 스스로에게 되뇐 채 눈앞의 현실을 넘기기로 결심했다. 어쩌면 체념을 곁들어 사는 것이 다음날을 시작할 수 있는 이유가 될지도 모른다고 믿으며 말이다. 엄마가 내 손을 잡고 집으로 되돌아갔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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