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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아본 적이 없어서 놀 줄 모르겠어

네가 그랬잖아. 이제는 기계가 모든 육체노동을 대신해 주고, AI가 네 대신 모든 선택지를 고민해 주고 선택까지 내려 줄 거라고. 그러니 이제는 일하지 않는 진정한 ‘나’의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노동하지 않는 삶을 어떻게 살아낼지 고민해 보라고 말이야. 참 행복한 고민이구나 싶었어. 시간이 오롯이 내 것이 된다니! 그런데 행복한 고민의 끝은 암흑이었어. 무엇을 하면 좋을지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었지. 해야만 하는 일이 수북할 때 나는 내 육체를 일으킬 수 있었고, 끊임없는 선택과 결정의 순간이 있어야만 내 머리는 사고할 수 있었지. 그런데 일이 없어지면 나는 뭘 해야 하지? ‘놀아 본 적이 있는 사람이 놀 줄 안다’라고 하잖아. 그렇다면 ‘논다’는 건 뭘까? 내가 아는 거라곤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연주하고, 그림을 그리거나, 컴퓨터 게임을 하고, 스포츠를 즐기고, 영화를 감상하고, 목공예를 배우거나…… 그렇게 생각하니 더 막막해졌어. 음치라서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버겁고, 가사를 외우는 일도 내겐 버거워. 음정에 몸을 맡겨 본 적도 없어서 간신히 엇박으로 박수를 치는 정도야. 좋아하는 연예인도 없어서 덕질의 즐거움마저도 모르는 걸. 그림을 그려 볼까? 겨우내 토끼 한 마리를 그려 보지만 균형이 안 맞아 비틀거리는 벌건 눈의 토끼가 있을 뿐이야. 온통 난해하기만 한 현대미술처럼 물감을 흩뿌리려고 해도, 그마저도 나는 어떻게 온몸으로 표현해야 할지 까마득해. 책으로, 넷플릭스로, 그 어디에 나는 빠져서 놀 수 있을까?


내게 있어서 여유는 퍽 짧은 순간이었어. 하루 내 일하고 와서 잠들기 전 마시는 맥주가 여유였고, 정신없이 일하다가 도피하는 책의 세계가 행복이었어. 짧았기에 더 감미로웠고, 찰나였기에 아쉬움에 내일을 기다렸지. 그런데 무한정으로 여유가 주어진다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맥주를, 빠져들었던 책을 여전히 좋아할 수 있을까? 당장 일하지 않을 주말을 그려 보니, 잠으로만 빠져들 내가 그려졌어. 배고픔도 못 느끼고, 내일도 없는 것처럼 가라앉았던 죽음과 같은 잠이었지. 나는 자유를 줘도 못 즐기는 인간이겠구나, 그야말로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사람이겠구나 싶었어. 지금은 일할 거리가 있지만 정작 일할 거리가 없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결국 나는 즐기는 것도 배워야겠구나 깨달았어. 선천적 재능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취득해야 할 경험치 같은 것처럼 여기기로 했지. 엇박으로 박수를 치면서도 그 사이로 리듬을 느끼려고 노력해 보려고. 삐뚤어지거나 서툰 선이 만들어내는 허탈함도 귀엽게 들여다보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 긴 시간을 채워야 할 빈칸이나 서둘러 무언가를 빽빽이 집어넣어야 할 캐비닛처럼 여기지 않기로 했어. 무엇이든 간에 일처럼 잘 해내야 한다는 압박감을 벗어던지고 멈춰서 보기로 했어. 능숙함을 유예하고, 우선은 시작해 보기로 했어. 여기까지 생각하고 보니 내게 목줄을 씌운 건 결국 나였더라고. 나는 무엇을 위해 처절하게 살아내고 있었던 걸까? 이제라도 나는 스스로에게 자유를 줘야겠다고, 그렇게 해보겠노라고 나는 너에게 선언하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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