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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진영 Oct 31. 2016

경주역 둘레

신라 천년 고도에 남겨진 지난 백 년의 흔적


막바지 더위 틈에 ‘이른 추석’을 보내서인지 여느 때보다 길고 깊게 느껴지는 가을날, 경주는 더없이 아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줄지은 답사 행렬도, 봉긋한 고분과 고분 사이로 자전거 페달을 밟는 여행자들도 가을볕 아래 기꺼운 마음은 다르지 않은 듯 보이는데, 그들과 달리 도심 골목으로 들어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석양에 예스러운 자태를 드러낸 구 서경사



너무도 당연하게, 틀림없는 공식인 마냥 '경주는 신라' 이리 단정했던 무심함에 스스로 무안해졌다. 찬란한 신라의 역사를 품고 있는 고도임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경주역 중심으로 역사 담장을 에두른 마을, 역전 대로에서 가지 친 도심 골목을 걸으며 그리 오래 지나지 않은 근대기의 지층을 마주한 데 대한 놀라움과 반가움이 큰 탓이다. 시기적으로 근대이긴 하나 일제강점기라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하리라. 근대기 우리의 많은 터전을 빼앗고 지배했던 일제의 눈에도 경주는 예사 동네가 아니었던 듯하다. 상당수의 일본 지식인들이 경주 기행을 나섰고, 심지어 일본의 어린 학생들도 경주로 수학여행을 올 정도였다고 한다. 1918년 10월 31일 대구에서 경주 시내를 통과해 불국사까지 경동선 열차가 지나기 시작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기차역 담장 너머로 뿌연 증기가 아득히 

기와지붕이 자락을 펼친 역사驛舍가 인상적이다. 플랫폼에 서서 바라본 경주역은 1918년 개통 당시의 협궤狹軌 노선을 1936년 오늘날의 표준궤로 바꾸면서 새로이 지은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그 날의 새 역사가 여든 해를 바라본다. 기존의 역사는 신라의 전통 건축 양식을 토대로 지은 목조 건축물이었다는데 1936년 철로를 바꾸면서 벽돌을 쌓고 회칠한 지금의 신식 건물로 지었다. 그러나 지붕은 기존의 형태를 본 따 전통미가 느껴지게끔 했다는데 완전히 우리 전통 양식은 아니다. 얼핏 일본의 신사가 떠오를 만큼 간결한 태가 난다. 세월에 장사 없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데군데 색 바랜 기와는 회색 철골과 통유리로 감싼 근래의 기차역에서는 쉽사리 느껴볼 수 없는 정감이 묻어난다.

 

경주역 선로 위를 시원하게 가로지르는 육교 너머로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이 솟아 있다. 바닷가였다면 대번에 등대라 생각할 법한데, '급수탑'이다. 급수탑이 세워진 1927년경에는 증기기관차가 달렸다. 증기기관차가 움직이려면 기차 내에서 보일러를 작동시켜 증기를 발생시켜야 하니 상당량의 증기발생용 물이 필요했다. 때문에 기차가 기관구機關區에 입고될 때면 급수탑에서 용수를 보충하는 일이 기본이었다. 더 이상 증기기관차는 운행하지 않지만 이 급수탑은 유효하다. 음용수를 제외하고 역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용수를 저장, 공급하고 있는 것. 전국에 여럿 급수탑이 남아있지만 현재까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이 급수탑이 유일하다. 급수탑 앞에는 석가탑을 닮은 10층 탑 하나가 있다. '무사고 기원탑'이다. 본래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신사 참배에 필요한 구조물로 세워졌다 하는데, 지금의 탑은 해방과 전쟁을 차례로 겪고 난 1955년 일제의 잔재를 없애고 열차의 안전운행을 기원하는 의미로 다시 만든 것이라 한다. 그 시절에는 해마다 무사고 기원제를 거행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나무 그늘 아래 호젓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담장 너머로 기차 소리 들려오면 저 홀로 무사안녕을 빌는지 모르겠다. 

 

여러 갈래의 열차 선로 너머로 육중한 몸체의 급수탑이 눈에 띈다.


경주역 담장 밖 황오동 일대는 일제강점기 철도관사 80여 호가 밀집했던 철도관사촌이다. 대전 소제동 철도관사촌에서 보았던 것처럼 하나의 주택 안에 두 세대가 가운데 벽을 공유하는 2호 연립주택 구조의 관사를 격자형으로 배치하였다. 때문에 담장 낮은 주택들이 소복이 모여 있지만 도로는 반듯반듯 잘 정리되어 있다. 상당수의 관사가 헐리거나 증·개축되었지만 골목을 걷다 보면 옛 흔적을 제법 마주하게 된다. 지붕 아래 벽면의 환풍구와 관사 번호를 적은 문패도 그러하고, 마당이나 집 앞에 듬직한 측백나무도 마찬가지다. 가지 촘촘한 측백나무는 당시 관사와 관사 사이를 구분하는 울타리 같은 것이었으니 측백나무 우거진 집은 관사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낯선 동네에서 눈썰미 뽐내며 숨은 관사 찾는 재미가 쏠쏠하더라.      


근래 비슷비슷하게 짓는 기차역과 달리 신라 고도의 분위기가 은근히 배어나오는 경주역
경주역 옆의 황오동 삼층석탑과 경주역사 지붕
일제강점기 경주 최초의 서양식 의료원이었던 그 야마구치 병원 건물이 지금은 화랑수련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빼앗기고 되찾고울었다가 웃었다가

경주역 광장 앞으로 쭉 뻗은 대로를 따라 십 여분을 걸으니 경주읍성이다. 신라시대부터 이어져왔을 역사이나 고려 때인 1378년에 다시 지었다는 기록이 있을 뿐 정확한 것은 알 수가 없다. 지금의 읍성은 조선 전기에 다시 짓고 임진왜란 때에 불 탄 것을 1632년에 동·서·북으로 성문을 내면서 다시 지은 것이라 하는데 그마저도 일제강점기에 대부분 헐리고 본래의 동쪽 성벽이 90m 남짓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성벽 앞 초록 잔디 위로는 주변에서 발굴된 석재들을 가지런히 모아 놓았는데 식민지배에 휘둘리고, 근대 도시계획에 치인 끝에 남은 씁쓸함이다.

 

주민들의 일상과 부대끼며 여전히 도심 가운데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경주읍성의 흔적
신라 땅에서 발견한 조선의 흔적이다. 주택가 좁은 골목길 한쪽에 일부 모습이 남아있는 옛 집경전 석실



경주읍성 주변으로는 고려와 조선에 걸쳐 경주 관아 자리였던 경주문화원과 경주 관아의 객사 건물이었던 동경관 그리고 조선 태조의 어진을 모셨다가 일제 때에는 인력거 보관소로 사용되었던 집경전 석실 등 우리가 알고 있는 신라 고도 경주와는 시간의 결이 다른 문화유산들이 이웃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 근대의 문화유산들을 살펴볼 수 있으니 대표적인 곳이 구 서경사이다. 

 

경주 구 서경사는 일본 불교 조동종에서 1932년경에 세운 사찰이다. 사찰이지만 종교적인 역할만 했던 것은 아니다. 해방 전까지 신자 대부분이 경주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었다는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당시 그들만의 커뮤니티 공간이었던 셈이다. 일본에서 자재를 들여와 일본의 전통적인 불교 건축양식으로 지었다는데, 특히 우리 전통의 한옥과 달리 지붕이 깎아지를 듯이 급한 경사를 이루어 정면에서 지붕면을 훤히 볼 수 있다는 것과 때문에 지붕이 전체 건물 높이의 절반에 가까울 만큼 집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점이 눈에 띈다. 해방 후에는 해병대 사무실, 한전 사무실, 농촌지도소 사무실 등으로 사용되었다는데 현재는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34호 전순임 판소리 전수관 팻말이 걸려 있다. 문은 열려 있으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던지라 삐걱대는 회랑식 목조 툇마루에 앉아 물끄러미 천장을 올려다본다. 묵직한 돌을 쌓아 탄탄하게 올린 경주읍성이 그리 헐려버린 것과 달리 이 작은 사찰은 건축 당시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고 한다. 

 

경주경찰서 맞은편 도로변의 화랑수련원은 1920년경 경주 최초의 서양식 의료원이었던 구 야마구치 병원 건물이다. 건물은 둘째 치고 이곳은 ‘신라의 미소’라 일컬어지는, 반쯤 깨어진 얼굴무늬수막새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 1930년대 야마구치 병원에 근무했던 다나카 도시노부라는 의사가 경주의 어느 고물상에서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이 얼굴무늬수막새를 구입했는데 1940년에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함께 가져간 것을 1972년 당시 경주박물관 박일훈 관장이 어렵사리 수소문하여 기증을 받게 된 것이다. 되찾은 두 말할 것 없이 다행인데 마냥 좋다 고맙다 할 수 없는 것이 참 애석하다. 

 

첨성대며 안압지며 내로라하는 문화재가 밀집한 역사유적지구 근처에는 가보지도 못하고 경주역 둘레만 걸었는데도 서너 시간이 훌쩍이다. 경주 명물 황남빵으로 출출함을 달래며 그제야 걸음을 멈춘다. 매대 뒤로 황남빵을 손으로 빚는 손길이 바쁘다. 그저 특색 있는 지역 상품 정도라 여겼는데 1939년부터 3대에 걸쳐 이어오고 있는 전통의 주전부리라고. 단 맛이 나지만 텁텁하지 않고 구수한 뒷맛이 좋다. 오늘 둘러본 경주의 근대와 같은 시간의 궤를 그리는 맛이라 그런지 더욱 음미하게 되더라. 


경주문화원 내 스웨덴 황태자가 심은 전나무 두 그루.


위 글은 2014년 2월부터 2015년 12월까지 농민신문사에서 발행하는 생활정보지 <전원생활>에 기고했던 '근대를 거닐다' 연재 가운데 2014년 11월호 '경주역 둘레'편의 원문임. (글 : 서진영 / 사진 : 임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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