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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명 Apr 27. 2017

시각예술로서의 영상

영상의 요소들 2 

플라톤은 예술이 현실을 모방하는 것에 대해 썩 신뢰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인지하거나 지각하는 현실조차도 기본적으로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플라톤이 설명하는 현실은 단지 동굴 속에서 지극히 세계의 일부만을 인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육체와 지각의 조건에 갇힌 인간은 불분명한 현실만을 그려낼 수밖에 없으며 현실 모방의 예술은 단지 동굴 밖의 빛에 의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 얼마나 영상적인 설명인가! 혹시 플라톤은 극장을 예견했던 것은 아닐까?) 



우리들은 훨씬 더 조화로운 우주, 즉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한 현상들만 볼 수밖에 없으며 이를 조금이나마 알기 위해서 좀 더 차원 높은 섭리와 직관의 질서를 떠 올려볼 필요가 있다고 한다. 인간은 끝없는 성찰과 자기 한계를 인식함으로써 조화로운 질서에 조금 더 나아갈 수 있다는 논지를 편다. 플라톤의 철학적 명제는 인류에게 인식의 조건에 관한 커다란 자양분을 제공한 것이 틀림없는데, 어쩌면 영상의 기본원리 역시 (지극히 제한적인 시각적 요소의 한계들을 조금씩 변주하고 첨부하며 세계의 외양을 조금씩 닮아가고자 하는) 이러한 구성 원리에 입각해 있다. 프레임의 연결과 연결을 통해 스토리와 인식이 발생된다는 영상 구성의 기본적 원리와 플라톤의 철학적 명제가 닮아 있다는 것은 참 흥미 있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오브젝트 Object (대상과 정보)



모든 대상은 프레임 안에 갇힌다. 두말할 나위가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상황이 조금 복잡해졌다. 양방향 미디어와 매체의 양상이 훨씬 복잡해진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총칭해서 뉴미디어라고 부른다. 그렇지만 영상이 재현의 기술 과정들 안에서 대상이 재현된다는 측면에서 그것 역시 프레임이라고 부를 수 있다. 영상은 가장 사실적 대상을 구현하지만 제한된 기술적 재현 조건 안에서만 현실이 된다. 그렇게 재현된 모든 사물, 인물, 대상과 풍경들 모두를 (있는 그대로의 현실 대상과 대조되는) 영상의 '표현적 대상'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프레임이라는 영상의 독특한 재현의 재현적 범위가 설정되기 때문에 대상들은 미적인 독창성을 지니고 발전할 수 있다. 말하자면 프레임 안에 존재하게 되는 대상들은 기술적으로 재현된 연극적 가상의 무대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라고 할 수 있다. 대상은 프레임이 존재하는 이상 관찰자 시점의 영향을 받는 세계관의 일부가 된다.  대부분 시각예술에서 통칭되는 오브제(object)는 그런 점에서 하나의 주제와 관련한 암시로 제시된다. 



영화 Blade Runner(1982) - 환등기의 한줄기 빛속을 비추는 공간에 주인공이 등장한다. 스크린 위의 인물은 대상 속 적이 누구인지 모른다. 마네킹 모습의 적은 알고 있다. 그것을 보는 관객들은 누가 적인 줄 안다. 프레임은 대상들이 제각각의 관계를 드러내는 시간 속의 무대이다. 우리의 시점은 선택적인 시선으로 대상의 관계성을 강화하거나 무시하면서도 연출자의 의도, 상징들 속에서 드라마의 일부가 된다. (이 영화의 경우 마네킹은 비인간화나 개인주의, 축제, 죽음 등을 떠올리는 상징 코드를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대상들은 다양한 시각적인 아름다움, 불안, 구도 속에서 사실상 우리의 문화적 코드, 감정을 자극하고 긴장을 유도하는 등 지속적으로 관객들과의 관련성을 발생시키는 스토리텔링의 장치이기도 하다. 모든 영상적 재현물들은 기본적으로 동굴속을 거니는 인간을 몹시도 닮아 있다.  


모든 대상들은 그 자체로서 정보와 메시지이다. 그렇다. 대부분의 영상 미디어는 묘사하고자 하는 대상의 성격과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상업 영상은 아마도 그것을 소유하거나 우호적인 관련을 맺고자 하는 욕망을 부추길 것이고 극영화에서는 대상이 지닌 의미나 아름다움을 설명하는데 기술적 노력을 기울인다. 다큐멘터리에서 인터뷰하는 사람의 뒤편의 책상, 소파, 전등들도 관람객들에게는 학식, 분위기, 신분을 나타내는 일종의 정보이다. 그러니까 모든 미적 아름다움이나 기술적 재현과정의 작은 디테일도 정보로서의 기능을 지닌다. 우리는 그것을 단지 무의식적으로 취사 선별하여 대상과의 유의미한 관련성을 구축해 나간다. 생각보다 많은 대상과 관련된 정보들이 미묘하게 영상적 정보 안에서 조작되거나 우리의 지각 안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한 번쯤 짚어 볼만하다. 영상도 정보 작용의 일부이며 재현 방식을 통해 사실을 전제하는 다양한 방식의 믿음과 시점으로 발전한다.  



 데이빗 크로넨버그 - 비디오드롬 (1983)    영상신호는 단지 '정보'이면서도 관람자의 인지적 내면 안에서 관계를 맺는 감정이입의 대상이 된다.


프레임안 사물, 인물들은 성격을 지닌다. 영상미디어가 아무리 기술적인 재현과정을 거친다고 해도 결국 우리의 인식에 착상될 때에 그 대상은 일종의 정서적 성격을 지니고 인식된다. 물론 정보의 전달을 위해 객관적인 관찰자의 시점을 유지한다고 해도 대상의 묘사는 심미적인 차원을 피해서 이루어 지기는 힘들다. 단 한 번의 카메라 앵글의 위치 이동을 통해서도 관객들은 예리하게 그것을 통해 심리적인 변화로 인지한다. 이러한 대상의 묘사와 전개 안에서 대상들은 제각각의 유니크한 성격(캐릭터)을 지니게 된다. 영상이 연출되고 전개되는 대상들은 주인공으로서 관련성을 맺게 되고 그러한 관계 작용 안에서 상대적인 성격들을 가진다. 우리는 감정이입의 대상으로서 인물들, 그 인물들이 움직이는 공간들, 공간 안에 놓인 사물들과 다양한 정보들을 취합하고 상대적인 의미 관계들을 구축한다. 이러한 작용들 안에서 모든 대상들은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영화사상 가장 유명한 씬 중의 하나 - 카메라는 눈은 대상이 되기도 시점이 되기도 하며 우리에게 맺힌다. 알프레드 히치콕 - 사이코 (1960)



카메라의 눈은 그러한 대상들의 움직임과 연동한다. 카메라는 관람객들의 고정된 위치에 비해 상대적으로 다차원적인 공간적 도약을 통해서 그 대상의 움직임을 포착하여 전달한다. 뉴미디어에서 이러한 제약은 점점 더 파기되어가는 추세이긴 하지만 카메라의 시점을 전재하지 않는 대상은 존립할 수는 없다. 게임 영상에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양방향적인 이동이 가능하다. (게임 영상은 관람객들에게 일방향적 관점을 탈피하게 해 준다는 점에서 독백적이라기보다는 경험적 시점을 강화하게 해 준다.) 대상들은 카메라의 눈과 연동하여 공간적인 움직임을 면밀하게 담아낼 수 있다. 움직임을 포착하거나 스스로 움직이거나 하는 카메라의 눈은 기술적 의미에서나 문법적 의미에서나 굉장히 주요한 요소이다. 대상의 움직임의 방향을 따라잡거나 주도적으로 개입하여 대체하거나 하여 대상의 심리적 시점을 카메라는 반영한다. 공간 안에서 수평 수직의 단순한 조형요소들도 그러한 눈의 움직임 안에서는 고압적 상황, 냉정한 거리, 분열적 갈등 등 다양하게 전달될 수 있는 심미적 형식으로 발전한다. 이것은 영상 미디어가 주어진 재현의 한계라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미시적인 분석을 가능하게 하는 훌륭한 재현 예술의 방식이 된다. 




미장센 mise-en-scéne


마틴 스콜세이지의 영화 <대부(1977)>의 마지막 장면에서 마이클은 부엌에서 자신을 뒤돌아 보는 아내의 모습을 보며 문을 닫는다. 그는 ‘정말로 살인을 했느냐?’에 대한 물음에 ‘아니’라고 대답한 직후였다. 문은 천천히 닫히며 화면이 실내의 어두운 색으로 바뀌며 영화는 끝이 난다. 모든 것이 변했고 상황은 종료되었으며 이 또한 새로운 시작임을 알리는 굉장히 멋진 장면이다. 이 장면은 영상에서의 미장센을 보여주는 좋은 예시이다. 대부 촬영팀들은 이 영화의 신화적 요소, 혹은 거룩함을 표현하기 위해 렘브란트의 회화를 연구했다. 이들은 특별히 처리된 조명과 촬영을 통해 깊은 우울함이나 빛을 통한 대조를 극대화한 장면들을 만들어 내었다. 고전 영화의 많은 구도와 색채의 배치에 서양 회화가 많은 참조가 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렘브란트-야경 1642 



마틴 스콜세이지-대부 (1977년) 


미장센이란 영상에서 화면 구성이나 조형적 배치를 통해 극의 전개에 필요한 의미나 성격을 전달하는 기법을 말한다. 미장센은 훌륭한 영화 연출가들의 효과적인 이야기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조형적 배치는 구도, 소품, 초점거리, 움직임, 인물 등을 통해서 영상 속 모든 요소들을 은유적인 표현의 장치로 활용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을 수사적으로는 메타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시각예술로서 영상을 활용하고자 할 때 조형요소들은 생각보다 강렬한 메시지를 남긴다.



예를 들자면, 지독한 고립감을 느끼는 한 남자를 표현할 때 인물의 클로즈 업, 혹은 광활한 드넓은 광야에 홀로 서 있는 인물 중에 연출가는 효과적인 구도를 선택해서 표현할 것이다. 또한 불안하게 상황을 주시하는 한 여성이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고 하자. 이를 표현하기 위해 인물을 부각하기보다는 떨리는 커피잔의 표면을 카메라로 접사 하는 방식이 효과적일 수 있다. 롤랑 바르트는 영화 <전함 포템킨>에서 불끈 쥔 사내의 주먹을 보여주는 화면은 ‘분노와 다가올 투쟁, 신념'을 암시적으로 표현하는 상징의 기능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영상의 화면에서 보여주는 그림들은 현실이라는 외시적인(denotation) 겉모습을 띄고 있지만 이미지의 상징, 성격을 전달하는 '관습적 언어'라는 것이다. 



파웰 파울리코우스키의 영화 <이다(2013년)> 는 특이하게도 4:3 비율로 촬영되었다. 아마 영화 속 내용과 동시의 8m 흑백영화를 흉내 낸 것일 수도 있다. 이 영화는 독특한 화면 구성을 많이 선 보인다. 감독은 이러한 구도를 통해 수녀인 이다와 타락한 친지인 그녀의 이모의 동행을 독특한 느낌의 여정으로 표현한다. 텅 빈 구도나 아래와 위 자주 화면을 나누는 선들은 선과 악이라는 다양한 갈래의 삶의 여정을 나타내기에 적합하다. 세계의 부조리나 고통을 마주하는 심란한 마음의 이다도 종종 아무런 대사 없이 화면의 구도를 통해서만 표현되기도 한다. 



파웰 파울리코우스키-이다(2013년) 


소품, 인물, 공간, 화면 구도 등을 통해서 효과적인 암시와 복선을 선택적으로 표현해 나가는 것은 영상은 단순한 정보의 전달이나 프로파간다의 도구가 아닌 심미적 표현의 도구라는 것이다. 미장센은 시각예술의 전통적인 구성 방식에서 빌려와 체계적인 시각 언어를 형성해 가는 부분이다. 미장센은 장면의 구성을 통해서 표현되지만 당연히 전체적인 상황의 맥락 안에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초기 흑백영화부터 미장센은 표현 미학에 관심 있는 연출가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특히 히치코크는 스토리의 맥락 안에서 조형적으로 심리적 효과를 미치는 짜임새 있는 방식 들을 잘 활용했다. 현대로 오면서 미장센의 구성적 방식은 다소 약화되는 면이 있지만, 게임, CG, AR 등에서도 기존의 영상문법이 활용되기도 한다. 




몽타주 Montage


몽타주란 ‘무엇인가를 결합시킨다’는 것이다. 영상에서는 네모난 컷의 연결 없이 어떠한 사건도 대상도 등장하지 않는다. 영상은 다양한 사이즈의 컷이 연결됨으로써 우리는 사실뿐만 아니라, 비로소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 우리는 A컷 다음에 B컷을 기대하고 그리고 C라는 의미를 만들어 낸다. 우리는 이 단순한 이미지의 순차적 연결방식을 통해 수많은 이야기들과 세계들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영상 미학은 러시아 영화감독 세르게이 에이젠 스타인 의해 1920년 이후 보다 본격적으로 완성된다. 몽타주는 컷의 연결을 통해 관객들에게 종합적인 사건과 시간의 흐름을 전달하게 되는 편집을 통한 고유의 이야기 전달 방식을 말한다. 몽타주는 시각예술 전반에 걸쳐 사용되어 오던 용어였다. 이 용어는 영상에서 특히 컷을 연결하여 새로운 개념, 혹은 상황을 전달하게 하는 고유한 미학적 본질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영화가 초기의 다양한 탐구를 통해 이러한 편집 과정은 1920년대 이후 서서히 자리를 잡아 나갔다. 우리는 현재 이러한 방식을 통해 영상을 익숙한 방식으로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이해한다. 몽타주는 단순한 편집 기법이라기보다는 특별히 영화를 가장 입체적으로 관객과 심리적으로 결부시키는 요소이다.  몽타주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을 이후에 다시 언급해 보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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