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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명 Sep 28. 2018

거울의 뒷면에는 무엇이 보일까

유미연 작가의 설치미술

상실이 낳은 애착과 유희


전시장에 들어서며 나는 서늘한 추위를 느꼈다. 물론 햇빛이 들지 않는 안쪽 전시장의 온도가 그런 느낌을 주었겠지만, 왠지 이전 유미연의 작품들을 보았을 때와는 달리 체감되는 사물들의 서늘한 풍경들 속 본질이 이번 작업들이 향해 갔던 지향선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원래 그의 작업들에는 활짝 피어난 것, 무한히 스스로를 복제 가능하며 증식되는 것들, 아름답지만 또 멎어 있거나 떨림을 암시하는 것들이 주된 설치 오브제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오브제는 설치작품들에서 종종 드러나기도 하는, 현실에서 떨어져 나와 전시장이라는 밀폐된 공간에서 일종의 유희적인 장난감, 수수께끼를 지닌 사물을 통해 작가의 상실감을 얼핏 드러내 주는 것처럼 보였다. 혹은 상상의 무대를 배경으로 한 번도 소유해 본 적이 없었던 기억이나 욕망의 현존을 펼쳐 놓은 듯 보이기도 했다. 



보이는 것들은 그 자체로 즉각적으로 완전한 현존의 권위를, 실존적인 의미의 이야기를 지닌다. 외시적인 것들은 영원불멸한 게임의 주인공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물들과 불완전한 희망을 지니고 기꺼이 사랑에 빠진다.




이번 전시의 공간에서는 그러한 상징을 비트는 듯한 (궁극적으로 사물에 관한 애착과 비슷한) 자기애의 유희가 사라지고 있다. 충실하게 공간이라는 무대를 사용하여 꼼꼼하게 오브제의 있는 그대로의 즉물적인 점유를 시도하고 있다. 실제 자연에서 채집한 억새들은 공중에 매달린 체 중력과 무관하게 아래로 향하고 있고, 모조물로 만들어진 갈대는 공중에 군집의 형태로 '사실의 외양'을 겨우 획득하고 있다. 시간의 양가적인 성질 – 시간 속 사물들의 소멸과 불안이라는 진정한 우울함에 관한 - 파스칼의 명제를 떠 올리게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의미를 확정하는 순간, 이번 작업들의 진정한 관심에 다가가는 것은 실패하게 된다.   


경계는 가까이 다가가면 격렬하게 저항하지만 뚫고 들어가는 순간 본질이 우리를 열렬히 환영하며 내면을 보여준다. 유미연 작가의 설치는 재현의 경계, 혹은 설치작업의 본질에 관한 하나의 지향선으로 다가가고자 한 것처럼 보인다. 보이는 대상을 꼼꼼하게 다른 공간으로 (화학적으로 변화시킨) 재현적인 위치 이동을 하면서 사물들이 지니는 시간적, 공간적 균열을 즉물적으로 경험하게 한다. 


<6가지 재현의 방식>이라는 작가의 이러한 제시는 한 번도 소유가 가능하지 않았던 사실들, 혹은 죽음에 대한 애도를 펼치는 무대로 공간을 점유하면서, 완전한 소유에 대한 꿈을 드러내는 희망 섞인 전략을 펼친다. 예술의 차원, 설치미술의 외양을 빌린 ‘현실의 부재’에 대한 작가 스스로에 대한 직면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번 유미연의 설치작업에는 일종의 작가적 용기가 스며있다고 느낀다.





또 다른 차원의 심연 속에서 


프레임 안에 들어선 영상 프로젝트에서 푸른빛을 뚫고 투사되어 벽면에 흐릿하게 비치는 열대의 어느 강가를 보면서 그 서늘함의 성격이 조금 더 분명해질 수 있다. 그 푸르른 빛은 아마도 물을 나타내는 것일 것이다. 물은 망막처럼 이미지를 투사한다. 우리의 뇌에 전달되어 비치는 흐릿한 이미지는 감각을 통해, 육체를 통해 각인되는 현실의 불투명한 이미지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마찬가지로 의미와 세계를 향해 열려있다고 하는 예술도 동일한 한계를 가지게 된다. 이것이 설치와 상상의 공간을 점유하는 실현 불가능한 현존의 욕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도처에 존재하는 상징들, 사물들의 환영들 속에서 완전히 욕망하고 소유하려고 했지만 남지 않는 이야기들 말이다. 그(그녀)가 남긴 많은 애착과 사물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 연결되지 않는 재현과 사실들의 결핍이야말로 우리가 치열해지는 근본적인 동력이었기에 쉽사리 외면할 수 없었던 것 아닐까?  




꽃과 함께 찍은 얼마 전 돌아가신 작가의 부친의 유품 사진. 그 앞에 실제로 놓인 조화. 참으로 서늘하고 막막한 작가의 애도이다. 하지만 그러한 상실 속에서 우리의 수수께끼는 진정으로 싹트는지도 모른다. 어떠한 상징을 통한 재현 방법에 관한 현대미술의 다소 원론적인 질문들 일수도 있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경계를 쫓아 다가가고자 한 작가 스스로의 지난한 열정, 극렬한 치열함이 남긴 상처에 관한 애도 인지도 모르겠다. 도처에 존재하는 상징들, 사물들의 환영들 속에서 완전히 욕망하고 소유하려고 했지만 남지 않는 이야기들 말이다. 그(그녀)가 남긴 많은 애착과 사물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 연결되지 않는 재현과 사실들의 결핍이야말로 우리가 치열해지는 근본적인 동력이었기에 쉽사리 외면할 수 없었던 것 아닐까?  





무중력에 놓여진 사물들의 묘한 상태 때문에 나는 사실상 전시장을 들어서며 마치 물속에 잠긴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러니까 생태박물관의 물속 체험관을 모조물로 설치해 놓은 듯한 전시장 말이다. 물이 암시하고 있는 감각기관인 시각의 제한된 재현의 한계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몸(물) 안에 갇힌 감각기관의 인지적인 한계-정신과 육체의 이질적인 불일치-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순간적으로 가변적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설치미술의 공간적 점유의 형태는 독특하게 대상에 대한 매혹으로 우리를 이끈다. 영상-사진-오브제-자연-푸른빛의 물결-실제의 물건들 속에 존재해 왔던 재현 속 ‘사물의 현존’은 한 곳에 고정되지 않고 자리를 옮기며 우리를 넘나들게 된다.  




죽음과 함께한 예술과 재현  


유미연의 이번 작업들은 재현이 어디서 왔을까? 혹은 사물의 현존은 어디에서 왔을까? -라는 지향선에 관해 스스로 용기를 내어 다가가고자 했던 기록들이다. 기호들 상징들 또 그것을 수사하는 많은 의미부여 속에서 지내야 했던 작가가 즉물적 설치작업을 통해 아무런 수사 없이 우리에게 권유하는 경험들은 무엇일까? 보이는 것들은 그 자체로 즉각적으로 완전한 현존의 권위를, 실존적인 의미의 이야기를 지닌다. 외시적인 것들은 영원불멸한 게임의 주인공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물들과 불완전한 희망을 지니고 기꺼이 사랑에 빠진다. 


죽음 앞에 놓여진 예술은 이러한 사랑과 충동적인 이야기들 속에서 질문거리와 숙제를 던져주는 하나의 경계이다. 우리가 가까이 다가갈수록 전혀 잡히지 않는 사물들과 재현의 결과물들. 은밀한 욕망들과 상상들과 좌절되는 상처들 위로 그토록 매혹적인 열망을 지니고 재현되는 사물과 유희의 과정에 새겨지는 본질이야 말로 이번 전시의 진정한 관심이라고 할 수 있다. 삶이라는 거울 바로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던 유보할 수 없는 질문들이야 말로 죽음과 이야기의 빈곤에서 예술이 함께 더듬어 갈만한 여백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번 전시와 작품들을 통해 유미연은 잡히지 않은 실제에 대해 그다지 친절하지만은 않은 나름의 방식으로 질문들을 던진다. 사물과 상징과 언어의 의미 확정 이전에, 사물들의 움직임이 우리에게 미세하게 던져주는 현실세계의 불가해한 불편함들이 그 공간에서 소실점 없는 관점으로 드리워진 것이 아닐까? 그래서 작가가 궁극적으로 도달했던 지향선이 바로 수면 아래에서 (혹은 삶의 경계에서) 바깥 세계를 바라보는 듯한 서늘함을 던져 주었던 것은 아닐까?   




유미연 작가  yumiye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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