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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명 Oct 05. 2018

작가의 흔적이 있는 작업실 스케치

조각가 허위영의 작업실 

어떤 의미에서 작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체로 전시장에서 작가는 눈에 띄지 않고 (고고하게 어디에 숨었는지) 작품의 설명과 작가명에 등장하는, 일종의 독립된 세계를 제작하는 엄밀한 관찰자이다. 우리가 전시장을 거닐 때나 작품을 볼 때 작가와의 만남은 어떤 특별한 공간 안에서의 태도와 권위, 텍스트의 연장에서 이해해야 하는 해석의 대상이 된다. 무엇보다 작가는 대체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작가를 만날 수 없다. 만날 수 없으니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물리적으로 작가가 멀리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현대의 미학적인 의미에서도 작가의 존재가 불확실한 시대이다. 예술이나 의미, 혹은 형식적인 혁신을 전개하는 작가는 급속히 변화하는 트렌디나 환경의 영향으로 점점 더 사회적 지위가 유동적인 어떤 직업적인 군으로 변화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면에서도 우리는 점점 더 작가를 만난다는 것이 힘든 일이 되어 간다는 것을 느낀다. 피카소나 스텔라, 베이컨 같은 작가들이 사라짐으로써 (어쩌면 예술 초기 모던의 이상을 포기하고) 이미 전문적 직업군으로 모두 흡수되어 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지역의 작가들이 살고 있는 집, 혹은 그의 작업실을 찾아가면 우리는 작가를 만나는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어쩌면 그곳에는 우리가 흔히 생각해 오던 '예술의 위기'나 '기획의 혁신, 정체성' 같은 추상적인 관념적 트렌디를 홀가분하게 벗어던지고 평범하고 단순한 삶을 벗 삼아 작업이나 소박한 생각들과 친분을 쌓으며 살고 있는 작가, 바로 그 사람을 만날 수 있게 된다. 어쩌면 그의 작업들이나 경력들이나 미디어의 미사여구에 비할 화려함과는 거리감이 있는 이러한 만남들은 일견 시시해 보일지도 모른다.



부산의 근교에 살며 주택과 작업실을 겸하고 있는 허위영의 작업실을 찾아가 보면 그 작가의, 아니 그 사람의 일상과 어떠한 삶의 기준을 모두 다 느낄 수 있게 된다. 오히려 전시장에서 보고 알아왔던 작가가 아닌, 소박하지만 강렬하게 어떠한 하나의 아이디어에 집중해 왔던 어떤 사람의 행동의 흔적을 발견하는 있는 그대로의 만남 같은 것들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지역에서 자리를 잡고 소리 없는 작업에 열중하는 작가를 문자 그대로 진짜 만날 수 있는 곳은 갤러리가 아닌 작업실이다. 



허위영의 작업실은 본인이 직접 디자인하고 조그만 포클레인을 구매하고 토목 작업까지 직접 하여 지은 주택 겸 스튜디오이다. 내가 아는 허위영은 오히려 건축가가 되기에 적합한 마인드의 소유자이다. 모든 것에 인과성을 부여하고 적합성에 맞는 실행을 선호하면서 또 모든 것을 혼자 해낸다. 초기의 모더니스트들을 떠오르기도 하지만 허위영은 건축이든 교육이든, 창작이든 모든 것을 자신의 방식대로 꽤 잘 해낸다. 나는 이 작가의 그러한 삶에 대한 태도들이 이 작업실 공간에 모두 함축되어 나타난다는 생각이 든다. 



미술을 하는데 기술과 의미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의 예술은 지나치게 예술을 위한 예술에 빠져 있는 감이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아요. 미술이 삶을 닮은 어떤 태도나 진정성 같은 것을 담아낸다면 그것이 사람들에게 감동이나 터치를 줄 수 있고 소박하지만 좀 아마추어 같은 제스처도 미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키엔체 부르노라는 사람이 찍은 The cup이라는 부탄 영화를 보면 그냥 아마추어들이 하는 옛날이야기 같은 것인데도, 참 마음이 와 닿고 흥미 있게 보게 되더라고요. 오락적인 영화로 다소 자극이 없더라도 이것이 예술로서 사람들에게 주는 담백한 이야기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아무렇게나 만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자연스러운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뜻이죠.  - 허위영 





작업실안 선반과 소품, 작업도구들의 흩어져 있지만 또 나름의 가지런 한 정리 속에서 이 모든 작가의 흔적들은 이러한 내면의 단상들처럼 나타나며 사라져 갔을 것이다. 아마도 전시장에서 우리가 만나는 작품들은 이 작업실에서 이루어 내었던 우연한 나타남 이상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작가와 그 작업실에서 보는 생생한 삶이나 작업을 흔적들을 제거한 개념적인 부연설명들이 얼마나 부차적인 것인가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한다. 허위영의 작은 소품들은 자신의 모습인지 또는 사람들을 관찰하며 얻는 모습인지도 모를 기묘한 표정과 형태들을 띄고 있다는 점에서 사람의 본성이라는 것에 갖는 작가의 소박한 관심들을 잘 나타내 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작업실의 도구들, 좋아하는 그림, 가지런히 정열 된 도구들을 보면서 나는 오히려 작가의 가장 본인다운 어떠한 습관들을 본다. 이러한 작은 불일치는 오히려 더 재미있고 다이내믹한 재능을 지닌 작가의 에너지를 느끼게 했다. 내게 왠지 작품은 작가의 어떠한 일면을 나타내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일상적인 작은 일들이나 매일 반복되는 작업들 속에서 허위영은 필경 진실에 가까운 어떠한 상념들과 만났으리라고 믿는다. 평범하고 지루해 보이는 번거로운 작업실을 챙기는 일들이나 작업을 위한 자잘한 재료들, 작업이 잘 되지 않는 시간을 보냈을 작업 테이블 한쪽의 햇살들은 분명히 작가의 세계를 잘 숙성시켜 주었을 것이다. 평범해 보이는 일들 속에 있는 특별한 의미들을 우리는 잘 알지 못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작가를 잘 만나지 못하고 있고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도 제대로 잘 만나지 못하고 살게 된다. 







허위영의 작업실에서 만나는 도구와 작품들은 자신이 직접 지은 그 공간에서, 놓인 그대로의 의미를 지닌다. 어떤 의미에서 작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대의 미학이나 트렌디나 사조들은 경박한 친구처럼 우리를 쉽게 배반한다. 그러나 반복되는 일상과 무언가를 적합하게 만들며 다듬어 내는 어쩌면 평범해 보이는 노력이나 태도에 깃든 사람의 비범한 에너지는 한결같이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우리가 살고 있는 가까운 곳, 어느 작가의 작업실에서는 더욱더 그렇다고 할 수 있다.  








허위영 작가  60gas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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