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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명 Oct 12. 2018

사람의 마음, 사진의 온도

송성진 작가의 사진 

카메라에는 색온도라는 기능이 있다. 우리가 white balance라고 부르는 기능이다. 이 개념을 알고 모르고는 사진을 감상하거나 카메라를 대할 때 굉장히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색을 다루는 카메라의 기본 메커니즘이므로 이것을 제대로 활용하지 않으면 사진은 모든 것이 우연의 산물이 된다. 흔히 카메라를 흰색판에 대고 흰색을 흰색으로 인식하게끔 하고 우리는 여기에 나름의 적절한 균형을 잡아 카메라의 색에 대한 인식을 높이게 된다.


만일 사람이나 사물의 온도가 있다면 어떠한 방식으로 나타날까? 우리는 나름 프레임을 통해 우리의 온도를 전달하고 교감하며 나를 인식하고 있다. 그 프레임을 짜는 인식의 틀은 어떤 과정을 통하게 되는 것일까? 사진이 전달하는 명료하고 간단하게 제시되는 삼차원의 체계는 반드시 우리의 인식, 혹은 심상의 온도를 제대로 전달해 주고 있는 것일까? 송성진의 사진 혹은 사실적 이미지의 회화는 이러한 생각과 심상의 ‘온도’에 관해 다각도로 바라보게 만들고 있다.  



대마도 



다대포 - 헤이차오



그의 사진은 쏟아지는 현란한 이미지의 무차별적인 강요 속에서도 조용히 오랫동안 그 사진 속의 세계를 들여다보게 만든다. 그 공간은 상당히 미세한 현실적 묘사를 하면서도 그 대상을 촬영한 사진가의 현장성을 지워 버리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라보는 그 공간은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또 다른 차원의 사실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또 다른 현실로 통하는 출구인 듯 그것을 바라보는 동안 나의 존재성을 은연중에 지워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익숙했던 대상과의 관련성들은 사라지고 그 공간은 우리에게 낯선 느낌들을 제공하면서 오히려 우리의 존재론적 부재를 드러내어 주고 있다. 한 꺼풀 벗겨진 시각과 인식의 연결고리들이 드러나며 우리는 좀 더 우리 내면의 심상의 온도에 근접한 심리적 풍경에 한걸음 더 다가가게 되는 것이다. 



 분명 풍경의 사실적 모습은 아니지만 그러한 조형적 리듬감은 어딘지 모르게 우리에게 공간의 보편성이나 심리적 특징을 드러내며 우리의 시선을 쉽사리 외면하지 못하게 붙들어 맨다. 그래서 우리의 지금 현실적인 일상 속 공간과 저 먼 곳 이국적 풍경은 동시적으로 우리 앞에서 동일한 공간으로 변모한다.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시간이 그 공간에 드리워진다. 


송성진의 사진 속 건물과 풍경은 각기 다른 장소와 다른 대상을 다른 시간에 찍은 것들이지만 비슷한 구도와 반복적인 배치로 익숙한 관습적 구도를 해체적으로 재구성하는 듯하다. 각각의 건물들은 익숙함과 낯섦이 동시에 부각된다. 분명 풍경의 사실적 모습은 아니지만 그러한 조형적 리듬감은 어딘지 모르게 우리에게 공간의 보편성이나 심리적 특징을 드러내며 우리의 시선을 쉽사리 외면하지 못하게 붙들어 맨다. 그래서 우리의 지금 현실적인 일상 속 공간과 저 먼 곳 이국적 풍경은 동시적으로 우리 앞에서 동일한 공간으로 변모한다.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시간이 그 공간에 드리워진다. 



북경-헤이차오



대상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의 주체를 닮는다는 측면에서, 우리 모두는 우리가 바라보는 것들의 아들, 딸들이 아닐까? 송성진의 사진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묘하게 비켜나면서도 바라본다는 것이 지닌 우리 자신의 상태, 즉 온도 temperature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가 보는 동안 어떠한 대상도 우리 내면의 심상의 온도가 되고 있고, 대상의 본질도 사실상 그러한 시선의 온도를 간직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대상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의 주체를 닮는다는 측면에서, 우리 모두는 우리가 바라보는 것들의 아들, 딸들이 아닐까? 송성진의 사진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묘하게 비켜나면서도 바라본다는 것이 지닌 우리 자신의 상태, 즉 온도 temperature를 떠올리게 한다. 카메라의 시선과 작가가 다소 의도적으로 진행했던 디지털의 작업 과정은 철저하게 디지털 미학의 기본 특성에 충실하다. 그러면서도 그의 이미지는 ‘응시’라는 관조적 행위의 존재론적 관련성을 짚어보면서 또 한편 재현이나 기억의 되새김이라는 기술적 특성 같은 것과 결부되어 있다. 



미얀마 




미얀마 2 



우리는 대상을 의미의 프레임 혹은 관습의 카테고리 안에 집어넣음으로써 어느 정도 어긋난 인식의 체계 안에서 온도를 측정하고 있다. 우리는 사물을 객관적으로 잘 이해한다기보다는 불편하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다. 디지털로 처리된 송성진의 사실적 공간이나 조그만 불빛을 밝히는 건물을 바라보고 있으면 우리가 아는 외부세계나 내적인 인식의 온도차에 한 번쯤 의문을 가지게 된다. 우리의 내면 마음의 카메라에는 어떠한 방식의 white balance가 존재하는가! 



그의 사진에 새겨지는 세밀한 사실성만큼 이러한 질문들은 은근하지만 강하게 와 닿는다. 극적 드라마나 효과적으로 연출된 사실적 상황들은 없다 할지라도 새로운 기술의 과정들 안에서 나는 우리의 내적 풍경에 관한 드라마가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술을 위한 예술을 마감하는 시대에, 우리는 그의 프레 임안 재현된 공간을 통해 새로운 인식의 공간으로 통하는 출구를 살펴볼 만한 시간을 가지게 된다. 물론 그 시간들은 물리적 단위의 특성을 지닌 시간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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