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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민석 Apr 12. 2016

황금 파도
2화

최민석




백성들에게 맥주를 많이 줘라맛있고값싼 맥주를

그러면 그들은 혁명을 일으키지 않는다.”

빅토리아 여왕(1819-1901)




#2   



몇 년이 흐른 뒤. 


- 많은 학자들이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도 세계 역사는 바뀌었을 거라 말합니다. 한 사람의 코 높이로 세계사가 바뀔 만큼 우리는 사소하고 개인적인 이유 때문에 영향을 받는 존재일까요. 아니, 세계사는 이토록 사소한 이유로, 즉 필연적 이유가 아닌 우연적 이유로 작동되고, 바뀌는 것 일까요? 


3월 말이 되자 완연한 봄이 왔다. 강의실 창 안으로 들어온 햇빛이 기혁의 얼굴에 쏟아졌다. 그 햇빛을 받은 기혁의 입술이 움직이고 있다. 여느 대학교수처럼 트위드 재킷을 입은 그의 팔꿈치에는 가죽 패드도 덧대어져 있다. 젊고 명석한 교수처럼 보인다. 


- 물론, 세계가 우연에 의해 작동되는 건 아닙니다. 그렇다고 반드시 원리와 타당한 이유에 의해 작동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기에 세계사에는 많은 우연들이 개입돼 있습니다. 가장 흔한 예로 클레오파트라의 코에 빠졌던 안토니우스는 악티움 해전에서 패했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바제타트는 통풍(痛風) 때문에 유럽 습격을 중단했죠. 그리스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인도 원정을 앞두고 애완용 원숭이에게 물려 죽어버립니다. 그의 죽음 후 대제국 영토는 이집트, 시리아, 마케도니아 세 나라로 나뉘어버립니다. 


기혁은 자신의 주장에 도취된 학자처럼 강단 좌우를 반복적으로 오가며 말을 이었다. 


- 때문에 20세기 초 영국학자들은 역사의 우연성에 주목했습니다. 물론, 몽테스키외처럼 반대 입장을 보인 이도 있습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지인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역사의 우연성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이렇게 밝혔죠. 


우연의 여지가 없었다면세계 역사란 대단히 신비스러운 성격을 띠게 될 것이다물론우연이란 것도 전반적인 발전 경향의 한 부분이 될 수 있는 것이고결국 다른 형태의 우연에 의해 상쇄되기 마련이지만역사 진행의 지속은 우연에 의해 좌우될 수도 있는 것이다그리고 이 우연 속에는 운동의 시발을 이루는 선구적 인물의 우연적인 성격이 포함된다.”


더 궁금하신 분은 E.H. 카가 쓴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자, 그럼 아쉽게도 이번 학기 강의는 오늘로 마칩니다. 


<민주주의와 세계사> 강의를 마친 기혁은 강의 자료집과 만년필을 챙기고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담백하게 강의실문을 열고 나가는 걸로 마지막 강의를 마치려는데, 누군가 뒤에서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기혁 총각오늘도 이렇게 가버리면 어떡해


에르메스 원피스를 걸친 한 중년 여성이 윙크를 하며 말했다. 한 손에 셀린느 핑크 클러치를 쥔 여성의 얼굴에는 볼살, 옆구리에는 허릿살, 몸에는 나잇살이 붙어 있다. 그 탓에 도무지 옷태가 나지 않는다. 여인은 기혁 앞에서 애교를 부리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만난 것도 다 우연인데역사를 써야지안 그래?


게다가 영혼에는 ‘넉살’까지 붙어 있다. 


오늘도 내빼면 나 화 낼 예정이야알지기혁 씨오늘이 다음 학기 수강신청 마지막 날인거아직 신청 안 했어


아니, 협박까지!


그러자, 갑자기 기혁을 둘러싼 아주머니 수강생들이 한 마디씩 거든다. 


맞아 맞아나도 신청 안 했어맥주 한 잔 하면 신청할 맛이 쫙쫙 올라올 것 같은데……


미사리에 장어 먹으러 가자는 것도 아닌데뭐 그리 겁을 드시나.


우리가 뭐기혁 씨 잡아먹어


그러자, 수강생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어쩌다 내 인생이 이렇게 됐나!’ 


기혁은 속으로 한탄했다. 비록 거창한 바람은 없었지만, 학창시절부터 열심히 살아왔다. 딴 눈을 판 것이라면 맥주 조금 마신 것뿐이다. 그런데, 어떡하다 이리 됐단 말인가. 자기 연민에 잠시 빠지고 나서 정신을 차려보니, 기혁은 어느새 수강생 아주머니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었다. 이 와중에 누군가 기혁의 손을 덥석 잡았고, 귀에 뜨끈한 바람까지 불어대며 말했다. 


우리 큰 딸이 과외선생 필요하다 그래서 그래다 상담이야 상담


이거손 좀 놓으시고……


아마 목동의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교양강좌를 듣는 수강생이라면, 기혁의 대사가 완곡한 거절이라는 것쯤은 눈치 챘을 것이다.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트 니부어가 그랬던가. 집단의 도덕과 행동은 개인의 그것들보다 현저하게 떨어진다고. 부촌의 사모님들 역시 개개인으로서는 모두 교양이 철철 넘치지만, 집단이 되어버리면 이렇게 얄궂게 변한다. 그때였다. 에르메스를 입은 여인이 기혁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지 말고요 앞에 노이쾰른가서 시원하게 딱 한 잔어때?


아니, ‘노이쾰른(Neukölln) 이라니!’ 노이쾰른이라면, 월급날만 되면 가장 먼저 달려가는 독일식 수제맥줏집 아닌가. 기혁은 금세 눈이 커졌다. 


정말상담할게 있어서 그래기혁 씨


기혁은 끌려가자니 자존심이 서지 않았고, 이대로 빠지자니 노이쾰른의 부드럽고 청량한 맥주에 침이 꼴깍 넘어갈 지경이었다. 무엇보다, 성가신 이들이지만, 이들마저 없으면 다음 달 부터 고시원에 들어가야 한다. 당장 이달 원룸 월세는 어쩔 것인가. 하여, 마지못해 극성스러운 수강생들을 따라 나섰다. 물론, 노이쾰른이 아니라면, 따라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실, 5년 전, 기혁이 상상한 미래는 지금과 완전히 달랐다. 보란 듯이 취업하여, 차도 사고, 폼 나는 오피스텔에서 멋진 야경을 보며 밤마다 한 잔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하지만, 단군 이래 최악의 취업률을 연신 경신해온 작금, 기혁 역시 난세의 예외가 될 순 없었다. 35살이 된 기혁은 이제, 백화점 문화센터의 교양 강좌 강사다. 1주일에 두 시간짜리 총 8주 강의. 총 수강료는 24만원, 수강생은 15명, 강사료는 수강료의 절반이다. 강의도 달랑 한 군데. 3.3퍼센트 세금 떼면 한 달에 87만원 3백 원을 번다. 88만원 세대도 못 되는 것이다. 게다가, 이마저 언제 잘릴지 모르는 신세다.


우선, 대학을 졸업하니 과외 자리부터 잘렸다. 번번이 취직에 실패하다, 마침내 출신학교에 재정을 대는 대기업에 취직을 했다. 그 회사는 ‘사람이 미래다’라며 광고를 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문장에는 수식어가 생략돼 있다고 여겼다. 소유격 수식어 말이다. 사람이 (우리 기업의) 미래다.’ 기혁 역시 그렇게 여겼다. 하지만 채용 석 달 만에 ‘희망퇴직’을 당했다. 말이 희망퇴직이었지, 사실상 정리해고였다. 그제야 기혁은 이 문장에 또 다른 수식어가 숨겨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핵심 수식어는 다른 데를 꾸미고 있었다. 


(맘껏 자를 수 있는) 사람이 (우리 기업의) 미래다.’


사실 그 회사의 광고가 완전히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었다. 사람이 미래다, 고 했을 뿐, 그 미래가 밝다고 말한 적도 없고, 희망적이다 라고 말한 적도 없다. 순진한 청년과 시청자와 사람들이 오해했을 뿐이다. 세상 이문에 밝은 자라면 그 미래가 절망적이라는 것쯤은 예측할 수 있었는데, 그걸 눈치 못 챈 기혁이 순진했던 것이다. 기혁은 아직 세상에 대해 모르는 것투성이라 자책했다. 그러나, 한 가지 만은 확실히 알았다. 


‘이 기업에서 만드는 캔맥주는 정말 형편없다. 참을 수 없는 맛이다!’


희망에 부풀에 있었던, 29세 장기혁은, 이제 더욱 더 생의 낙이라곤, 오로지 맥주 밖에 없는 35세 장기혁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맛있는 맥주란 대개 비싸기 때문이다!


노이쾰른 문을 열면서 ‘에르메스’가 ‘과외’ 아줌마에게 물었다. 


근데벌써 큰 딸이 과외 받을 나이야?


과외가 대답했다. 


과외는 무슨이제 여섯 살인데


그럼상담은 뭐야?


그러자, 과외는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상담이면 다 성상담 아닌가안 그래기혁 씨?


기혁은 그날 또 한 번 만취하고 말았다. 물론, 그래도 노이쾰른의 맥주 맛은 최고다. 




                                                                                  *



한 편, 같은 시각.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후보 등록을 하루 앞둔 제1야당 민중당 정책기획실에서는 긴급 최고위원회가 소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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