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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지나가고> 후기,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다. 꽤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더라도 복잡다단한 세상에 속한 우리는 자주 나약한 순간을 경험한다. 특히 자연재해와 죽음은 인간이 감히 손쓸 수 없는 영역이다. 이 상황들은 우리의 실수나 잘못에서 기인된 것이 아니다. 예기치 않게 직면하는 것이다. 물론 징후들로 어느정도 대비책을 마련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상황 자체를 막을 수는 없다.


<태풍이 지나가고>는 원했던 모습이 아닌 삶을 살아가는 어른들을 위로하는 영화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고백했던 말이 이 영화의 메시지를 압축한다. “저도 되고 싶은 어른이 되지 못했어요.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겠죠. 그렇다고 그게 불행하단 건 아니지만,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죠. 지금 이 일이 매우 즐겁고, 이 일을 감사하게 받아들이지만, 어렸을 때 꿈꿨던, 인생의 답을 알고 있는 어른이 되지 못했다.” 초등학생 때는 프로 야구선수가, 중·고등학생 때는 안정적인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교사를 바랐던 그다.


인생은 변화무쌍을 경험해 나가는 과정이다. 단편적으로 어린 시절이 모습을 발견할 수 없을 만큼 달라진 지금의 내 모습만으로도 굴곡진 인생사를 정리할 수 있다. 원아 시절의 나는 의사가 되기를 바랐다. 재능(자신이 타고난 의사라고 생각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과 상황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장래희망 기입란에 의사라고 썼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꿈이 어느정도 이어지다가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훌륭한 담임선생님을 만난 적이 있어 ‘교사도 괜찮은데?’라고도 생각했었다. 곤충관찰에 흥미를 느낀 아주 잠깐의 기간에는 파브르 같은 곤충학자가 되기를 바랐던 때도 있다. 고등학교 진학 후 공부에 흥미가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창의성을 요하는 직업군에 관심을 갖기도 했다. 장래희망 하나만으로도 변화무쌍한 변천기를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변덕을 부리던 나다. 이 변덕은 성인이 된 후 지금까지도 똬리를 틀고 있다.


어찌됐든 지금의 나는 스스로의 능력을 발견하고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직업을 택하여 밥벌이 정도는 하며 살아가고 있다. 성공한 삶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불만족스럽지도 않은 평범한 일상. 지대한 성공이나 뚜렷한 목표를 정해두지 않고, 매일 주어진 일에 매진하고 사랑해 마지않는 영화감상과 글쓰기를 하면서 적당한 만족과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열정이 최고조에 달했던 20대때와는 달라진 삶이다.



누구에게나 태풍의 위기는 온다



인생이 순항으로만 이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살아가는 것은 만만치 않다. 행복과 고통, 기쁨과 슬픔이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는 것이 삶이다. 최정점에 달하는 순간이 있다면 암흑기에 몸서리칠 때도 있다.


<태풍이 지나가고>의 주인공 료타(아베 히로시)에게도 전성기가 있었다. 15년 전, 문학상을 받은 촉망받던 작가였던 그. 현재는 차기작 구상을 핑계로 사설탐정으로 일하는 이혼남이다. 일로 번 돈은 도박에 써버리는 탓에 전부인에게 양육비도 제때 못 주는 상황이다. 한마디로 경제적으로 무능하고 가족에게도 소홀한 한심한 아버지다. 친가족도 그의 상황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 특히 누나 치나츠(고바야시 사토미)는 대기(‘대기만성大器晩成’에서 만성을 뺀)만 하고 수시로 돈을 빌려 달라는 부탁만 하는 동생을 비아냥대기 일쑤다. 료타를 격려하는 사람은 엄마 요시코(키키 키린)뿐이다.


“곤약 조림은 천천히 식혀서 하룻밤 묵혀야 맛이 제대로 들어. 사람하고 똑같지.”

요시코는 언젠가는 목표를 이룬 아들의 모습에 희망을 건 채 살아가고 있다. “나는 대기만성형이야.”라고 말하는 료타의 말을 믿어주는 유일한 존재다.


료타의 현재는 태풍의 직격탄을 맞은 상태다. 이혼, 경제적 위기, 작품활동에도 진전이 없는 그의 상황은 암흑기 그 자체다. 그가 의뢰인의 말 ‘내 인생 어디서부터 이렇게 꼬인 건지’를 포스트잇에 적어 벽에 붙인 것은 그만큼 공감했다는 뜻이다. 료타에게 닥친 또 다른 태풍은 아버지의 죽음이다. 이 상황에서도 애도는 커녕 아버지의 유품을 팔아 한 몫 챙기겠다는 철없는 생각에 젖어 있다.


태풍은 곧 기회다


강풍이 불어 닥쳐도 모두가 피해자가 되는 것이 아니듯, 암흑의 시기가 닥쳐도 죽으라는 법은 없다. 우리에게는 태풍을 견딜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꿈’이다. 어릴 때부터 쌓아온 꿈, 현실이 무너져도 내면에 굳건히 자리잡고 있는 꿈이,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우리를 바로 서게 한다.


태풍은 평온했던 일상을 한순간에 탈바꿈시키는 위협적인 존재다. 하지만 피할 수 없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편이 좋다. 미국의 정치가 람 이매뉴얼(Rahm Israel Emanuel)이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위기를 낭비하지 마라. 이 말의 의미는 위기는 기존에는 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해볼 수 있는 기회라는 의미이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위기는 기회일 수 있다. 요시코도 태풍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는 주의다.


“난 태풍 아주 좋아해. 속이 뻥 뚫리는 것 같거든.”


태풍은 묵은 스트레스를 해소시켜주는 동시에, 리셋의 역할을 해주어 새 삶을 시작할 수 있는 지반을 형성해주기도 한다. 더불어 성찰의 시간을 제공하기도 한다. 위기를 기회화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뉴턴(Issac Newton)이 있다. 그가 입학했던 영국의 케임브리지대학교는 1665년 흑사병의 대유행으로 임시 폐교된다. 이후 2년 동안 고향에 내려가 한적한 환경에서 과학과 철학에 대해 고찰한 결과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할 수 있었다.


2020년.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세계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으로 위기를 심각한 위기를 앓고 있다. 기하급수적으로 감염자가 늘어나고 곳곳에서 사망자가 속출하는 상황은 전세계인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이로 인해 경제적 위기는 물론, 사람들 간의 거리도 멀어졌다. 주머니 사정도, 타인과의 관계도 팍팍해졌다. 일할 요량으로 찾은 카페의 옆좌석에 앉은 사람이 재채기 한 번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내 모습에서 비인간성을 발견했다. 사실상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는 타인을 향한 의심의 눈초리를 쏘아대는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나 역시 나름의 자체 격리 기간을 두 달 정도 가졌다. 한 달에 1회꼴로 만나오던 친구들과도 전화나 메시지로 안부를 묻는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무엇보다 지방에 있는 부모의 얼굴도 마음대로 보지 못하는 상황은 치명적이었다. 일도 줄었다. 특히 오프라인 행사의 잇따른 취소로 계획했던 일정이 틀어졌고 주머니도 가벼워졌다.  

한데, 텅 빈 시간과 헛헛한 마음을 채우느라 모바일쇼핑을 해댔더니 더 가난해졌다.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그러다 번쩍 정신을 차렸다. 쉽게 걷히지 않을 것 같은 상황에서 스스로를 제어하지 않으면 완전히 무너질 것 같았다. 이렇게 마음을 잡기 시작한 순간, 환경도 변하기 시작했다. 끊겼던 일이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고(여느 때보다 훨씬 바빴다), 당장의 수익을 안겨줄 일거리는 아니었지만 미래에 보탬이 될 만한 다양한 기회요소들이 찾아왔다.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열심히 붙들었다. 예기치 않게 모든 것을 잃게 되는 상황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깨달은 후 다가오는 것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일이 주어지는 것 자체에 고마운 마음을 갖고 최선을 다해 일을 처리했다. 덕분에 담당한 브랜드의 매출신장이라는 쾌거를 이뤄냈다. 이 일을 하면서 타인의 힘, 즉 협업의 중요성도 깨닫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가진 능력과 발 빠른 대처가 없었다면 절대 해낼 수 없었던 결과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결국 해낸 것이다.


나는 이 위기상황을 통해 한 뼘 더 성장했다.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 자체에 대한 감사, 타인의 중요성, 시행착오를 통한 성취. 이것들이 내가 단기간에 체득한 교훈이다. 태풍이라 하기엔 뭣하지만 돌풍으로 인해 대처능력 향상과 마인드업을 경험할 수 있었다.


코로나 사태는 웬만한 태풍보다 더 큰 피해를 가한 역사에 남을 사건이다. 제 잘못에서 기인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타격을 입은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다. 하지만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발 빠른 대처를 했기에 우리나라는 비교적 빠른 시간 내에 사태가 진정될 수 있었다. 불같이 타오르던 심각한 상황도 이제는 지난 일이다.



태풍이 지나간 뒤에 깨달은 것들


좀처럼 힘을 꺾지 않을 것 같던 태풍도 언젠가는 지나가기 마련이다. 료타가 겪은 아버지의 죽음, 아내 쿄코(마키 요코)와의 이혼은 가까운 사람과 이별하는 것은 태풍보다 더 치명적인 사건이다. 하지만 상실로 인한 고통도 시간의 흐름과 함께 그 농도가 얕아지게 마련이다.


료타는 부재(不在)를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 ‘아버지처럼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으로 살아왔던 료타는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자신의 인생을 성찰하며 아버지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아버지의 삶이 생각대로 잘 안 풀린 것 같아. 여러가지가. 시대 탓에.”


료타의 현재는 아버지의 과거와 비슷하다. 아버지에게 동병상련(同病相憐)을 느낀 료타는 자신의 삶을 시대(상황)탓으로 돌리며 자위한다. 그런 아들에게 요시코는 촌철살인의 한 마디를 날린다.


“시대 탓을 했지. 다 자기 잘못인데.”

맞다. 아무리 태풍이 불어 닥쳐도 살 사람은 살아간다. 상황 탓만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왜냐하면 탓을 해봤자 달라질 게 없기 때문이다. 강풍에 몸이 심하게 흔들려도 곧게 위로 뻗어가는 나무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불가항력의 요소를 제외한 것들을 제어할 힘이 내재돼 있다. 따라서 적기에 손을 쓴다면 어느정도는 내 뜻대로의 삶을 개척해 나갈 수 있다.


료타가 겪은 두 가지의 상실에는 차이가 있다. 죽음은 불가항력의 요소이고 이혼은 료타가 자처한 것이다. 하지만 이 상실은 ‘때늦은 후회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공통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료타가 근무하는 흥신소의 사장(릴리 프랭키)은 “남자는 잃은 뒤에 비로소 사랑을 깨닫지.”라는 말을, 쿄코는 “그렇게 열심히 아빠 노릇 할거였으면 같이 살 때 잘 하지 그랬어?”라고 나무란다. 영화 말미에 등장하는 요시코의 말은 이 모든 말들을 한 마디로 정리해준다.


“떠나고 난 뒤에 그리워해봤자 소용없어. 눈 앞에 있을 때 잘 해야지. 왜 남자들은 현재에 충실하지 못하는 건지. 도대체 언제까지 잃어버린 것을 쫓아가고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그렇게 살면 하루하루가 즐겁지 않은데. 행복이라는 건 무언가를 포기하지 않으면 손에 받을 수 없는 거란다.”



그럼에도 살아간다


이와 같은 교훈을 들어도 우리의 삶은 좀처럼 달라지지 않는다. 후회의 연속이다. 후회가 막심한 짓을 저지른 후 이불 킥을 날릴지라도 우리는 굳건히 살아나간다. 새아침을 부여받은 우리는 멀쩡한 두 다리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다. 생애 가장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더라도 이혼을 하고, 나름의 효도를 해놓고도 죽은 뒤에 ‘더 잘 해드릴걸’하며 후회하는 것이 현실이다. 어떠한 삶을 살든 후회가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다. 그래서일까. 꽤 긴 삶을 살아온 사람들은 주어진 상황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삶에서 행복을 발견하기도 한다.


“난 평생 누군가를 바다보다 더 깊이 사랑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없을 거야, 보통 사람들은. 그래도 살아가는 거야. 그럼, 그런 적 없어서 살아갈 수 있는 거야. 이렇게 하루하루를, 그래도 즐겁게. 인생이란 거 단순해.”


요시코의 명대사다. 엄청난 성공과 사랑에 기대를 거는 것은 젊을 때 가질 수 있는 욕망이다. 하지만 이 끓어오르는 열정이 평생 지속되리라는 보장은 없고, 꿈꾼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이룰 수도 없는 법이다. 또, 사람마다 성공의 기준이 다르고 그 때가 찾아오는 시기도 다르다. 료타가 대기만성형인 것처럼, 그의 아들 싱고(요시자와 타이요)가 야구 경기 때 홈런이 아닌 포볼을 기다리는 것처럼 사람마다 성공의 기준치와 만족을 느끼는 지점이 다르다.


중요한 것은 크든 작든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대상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다. 태풍이 휘몰아치던 날, 료타는 어린시절 추억이 깃든 놀이터 동굴에서 싱고와 이런 대화를 나눈다.


싱고: 되고 싶은 사람이 됐어?

료타: 아빠는 아직 되지 못했어. 하지만 되고 못 되고는 문제가 아냐.

중요한 건 그런 마음을 품고 살아갈 수 있느냐 하는 거지.

싱고: 정말?

료타: 정말이야, 정말이야. 정말로 그래.


료타가 현재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는지에 대한 정확한 속사정은 알 수 없다. 또한 밝은 미래가 올 거라는 보장도 없다. 하지만 매 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고 한 걸음이라도 내딛다 보면 지금보다는 나은 상황이 찾아오리라 믿는다.


삶은 다양성의 연속이다. 지금 당장 힘들더라도 앞날은 빛날 수 있다. 태풍이 걷힌 후 언제 그랬냐는 듯 휘황찬란한 무지개 빛 하늘이 펼쳐지는 것이 인생이다. 그러니 되고 싶었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더라도 당신의 삶은 충분히 괜찮아질 수 있다. 엔딩 OST ‘심호흡’의 가사처럼 주저하지 않고 나아가면 된다.


‘꿈꾸던 미래가 어떤 것이었건. 헬로, 어게인. 내일의 나. 놓아버릴 수 없으니까. 한 걸음만 앞으로 또 한 걸음만 앞으로’



<태풍이 지나가고>의 매력은 우울할 수 있는 주인공의 상황을 밝게 그려낸 점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자신의 첫 에세이집 《걷는 듯 천천히》에서 ‘결핍은 결점이 아니다. 가능성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세계는 불완전한 그대로, 불완전하기 때문에 풍요롭다고 여기게 된다’라고 밝힌 것(2)처럼 지금의 결핍을 가능성으로 생각하고 채워 나갈 수 있는 당신이 되기를 바란다. 성공보다 중요한 것은 어제보다 조금 더 성장한 오늘의 당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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