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영화 <위플래쉬> 리뷰, 과유불급이오!

“난 정해진 한계를 뛰어넘게 하고 싶었어.”

공포나 스릴러, 블록버스터 액션물은 한여름을 이겨내는 데 한 몫 제대로 하는 영화 장르다. 하지만 장르와 상관없이 나를 공포에 질리게 만든 영화가 있다. 바로 <위플래쉬>다. 지금까지도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의 기억이 뇌리에 생생하게 박혀 있다. 100여분의 러닝타임 내내 가파른 호흡과 끓어오르는 체온을 경험했다. 영화가 끝난 후에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입을 벌린 채 엔딩 크레디트가 사라질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다리가 후들거렸기 때문이다. 동행인에게 “와!” 외마디를 내지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부끄러운)행동을 보여주기도 했었다.


그만큼 <위플래쉬>는 내게 충격을 던진 영화다. 나와 동일한 경험까지는 아닐지라도 이 영화를 웬만한 공포, 스릴러물보다 섬뜩하다고 느낀 관객은 많으리라 생각한다.



<위플래쉬>는 열정을 그린 영화다. 하지만 열정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는 표현이 다소 아쉽다. 그래서 나는 지인들에게 ‘혈정(血情)의 영화’라고 말하곤 한다. 주인공 앤드류(마일즈 텔러)가 쉴 틈 없이 내뿜는 열정의 분출물은 방탄소년단의 곡 제목인 ‘피 땀 눈물’을 연상하게도 만든다.


열정은 대개 긍정적인 뜻으로 사용된다. 수많은 성공한 사람들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두 배 이상 노력하는 열정을 발휘하라고 말한다. 물론, 성공을 바란다면 남들 이상으로 목표를 향해 달려야 한다. 누군가는 미치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



NO. 1


누구에게나 타고난 재능이 있다. 하지만 그것에 ‘천재적인’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만한 사람들은 많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능력의 최대치를 끌어올리기 위해 열정을 갖고 노력한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말이다.


재능의 기준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은 성공을 원한다. 앤드류 역시 ‘위대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청년이다. 어릴 때부터 최고의 드러머가 되겠다는 목표 하나만으로 살아온 그는 최고의 명문 셰이퍼 음악학교에 입학하지만 실력을 인정받지 못해 자괴감에 빠져 있다. 그럼에도 부단히 노력해오던 앤드류는 어느 날 ‘스튜디오 밴드’를 이끄는 플렛처 교수(J.K. 시몬스)에 발탁돼 밴드에 합류할 기회를 얻는다.


플렛처는 보통의 인간이 아니다. 한 마디로 칼 같다. 뭐든 정확하기를 강요하는 그는 합주를 삐끗하게 만드는 밴드원을 용서하지 못한다. 틀림을 발견하는 즉시 인격 모독에 가까운 폭언과 욕설을 내뱉기 일쑤지만 그에게 인정받는 것이 성공의 척도로 여기는 학생들은 참고 버틴다.


플렛처의 인생사전에 자비는 없다. 오직 밴드의 성공만을 바라는 그에게 있어 밴드원들은 부속품에 불과하다. 실수 한 번으로 메인 연주자가 바뀔 수 있기 때문에 학생들은 좌불안석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피나는 연습을 하지 않으면 메인 자리를 꿰찰 수 없는 것은 당연지사. 노력하더라도 플렛처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한순간에 밴드 활동까지 할 수 없게 된다. 이렇듯 플렛처에게는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격언도 통하지 않는다. 오직 1등만이 그의 옆에 설 수 있다.


앤드류는 NO. 1이 되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피가 터지고 살이 상하여 문드러진 손을 얼음물로 마비시켜가면서 연습에 매진하는 모습은 멋있게 보이기보다는 연민을 자극한다. 특히, 경연 시작시각을 맞추기 위해 교통사고를 당한 몸을 이끌고 달려가는 장면은 혀를 내두르게 만든다.


“난 정해진 한계를 뛰어넘게 하고 싶었어. 영어에서 가장 해로운 말이 바로 ‘참 잘했어’야.”

플렛처 사전의 열정은 보통의 심상을 훨씬 뛰어넘는다. 더군다나, 그가 자주 지휘하는 곡명이자 영화의 제목인 ‘위플래쉬’처럼 밴드원에게 채찍질만 가한다. 그렇다면 가혹한 채찍질이 행복한 삶을 보장해줄까.



광기의 최후


아니다. <위플래쉬>는 당근 없는 채찍질과 도를 넘어선 열정이 해악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목표에 살짝 미쳐 있던 앤드류는 실로 미친 시기를 겪는다. 플렛처의 경쟁심 부추기기, 끊임없는 채찍질이 화를 초래한 것이다. 그의 밴드원들에게 플렛처는 하나의 트라우마다. 자리를 지키기 위한 집착, 경쟁에서 비롯된 분노가 광기로 이어진 것이다. 그는 35세에 요절한 ‘비밥의 창시자’ 찰리 파커(Charlie Parker)의 성공 신화를 예로 들어가면서 자신의 악행을 정당화해왔다.


“찰리 파커가 조(Jo Jones)가 던진 심벌즈에 머리를 맞고 ‘버드’가 된 건 알지?”

제2의 찰리 파커를 배출하기 바랐던 플렛처에게도 나름의 업적이 있다. 션 케이시.

“교수진들도 모두 가망이 없다고 했지. 음계 못 잡는다고 자길 저주했지. 하지만 나는 아무도 못 본 걸 봤지. 그 아이에게서 열정이 보였어. ‘링컨 센터’에서 3등을 했단다. 1년 뒤엔 1등을 했지.”


하지만 그는 불안과 우울증으로 고생하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 사례는 광기로 이뤄낸 성공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명징하게 보여준다.



분노에 휩싸인 앤드류 역시 최고의 실력을 인정받지만 무기력에 이른다. 상식 밖의 행동이 부른 파장에 짓눌리고 만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 놓인 사람은 하나밖에 보지 못한다. 따라서 진짜 중요한 삶의 가치들을 놓치고 만다. 가족과 친구, 연인은 물론 목숨까지 잃어버린다. 그토록 갈망하던 성공의 명패를 쥘 수 있는 존재조차 되지 못하는 것이다.


지나친 열정은 타올라 사라지고 만다. 특히, 외부에 의해 강요된 열정은 심지 없는 초와 같아서 불을 지펴줄 외적 요소들이 사라지는 순간 힘을 잃는다. 무엇이든 맹목적인 것은 위험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 집중해야 괜찮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중심인 삶


위인이 되고 싶었던 앤드류의 현재는 썩 괜찮지 않다. ‘타인(플렛처)의 인정이 곧 성공’이라고 믿었던 그는 드러머로서의 성공도, 사랑도 쟁취하지 못했다. 다행히도 극한의 열정과 광기, 소중한 사람을 잃은 경험을 토대로 앤드류는 깨닫는다. 내가 중심에 선 삶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타인의 인정을 받지 못했던 과거의 앤드류는 자주 찼던 극장의 아르바이트생 니콜(멜리사 베노이스트)에게 데이트 신청을 건넬 용기가 없을 만큼 의기소침했다. 그가 용기를 낸 시점은 플렛처의 밴드에 합류하게 되면서부터인데, 이는 타인의 시선이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렇게 얻은 자신감은 또 다시 타인의 시선에 의해 떨어지고 만다. 타인에 이끌린 삶의 폐단이다. 하지만 스스로가 이끄는 삶은 살아가는 사람들은 다르다. 앤드류가 마지막 5분 동안 즐기듯 드럼을 다루는 모습처럼 인생을 즐긴다. 타인의 시선에 갇혀 자유를 잃은 자들의 팍팍한 삶과는 대조된다.


진정한 교육은 스스로가 주인이 될 수 있는 삶의 방향을 제시해주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성찰할 힘을 심어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 피교육자들은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가치를 깨닫고 진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자각하게 된다. 자유를 억압하고 피나는 열정만을 강요하는 교육은 참된 행복과 사랑, 성취를 왜곡하여 집착과 분노, 또 다른 욕망에 허덕이는 문제를 발생시킨다.


‘우리는 자기 존재를 형성하는 힘을 외부에서 찾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의식 속에서 성공과 실패는 불가피하게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상태와 결부된다. 이 때문에 충만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그 세계를 좋은 세계로 인식하여 그 상태로 보존하고 싶어하지만 좌절한 사람들은 급진적인 변화를 선호한다.’ - 에릭 호퍼 《맹신자들》


타인의 시선에 휩싸이면 충만감을 느낄 수 없다. 매순간 타인의 감정과 평가에 신경을 쏟는 그들은 자신에게 쏟을 시간과 에너지가 부족해질 수밖에 없다. 타인의 평가, 특히 존경하는 이의 평가는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거기에 지나치게 집착하면 정작 중요한 자기 자신을 잃게 된다. 내가 중심이 삶이 중요하다. 결국 스틱을 쥐고 드럼을 두드릴 수 있는 사람은 앤드류 자신이었다.



중용


살아가면서 신경 써야할 중요한 가치는 한두가지가 아니다. 한 가지 영역에 모든 열정을 쏟아 붓는 것은 위험하다. 성공과 사랑 모두 중요하다. 물론, 두 마리 이상의 토끼를 완벽하게 잡는 것은 힘들겠지만 중용의 자세를 갖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문제는 완벽을 지향하는 것이다. 1등을 강요당하고 1등이 되기를 바랐던 앤드류는 완벽해지기 위해 사랑을 거부한다.


“난 이제 모든 걸 쏟을 거야. 그래서 우리는 계속 사귈 수 없어. 내가 너와 시간을 보내도 난 드럼만 생각하고 재즈와 악보만 신경 쓰겠지.”


훗날 사랑의 중요성을 깨닫고 후회하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쳐봐도 소용없다. 모든 것은 다 때가 있기 때문이다. 사랑 뿐만 아니라 우정, 아버지와의 관계도 원만하지 않다. 드럼 외의 그 어떤 것에는 노력을 쏟지 않았던 그의 최후다.


아버지: “마약중독에 빠져 34세에 죽는 건 내 성공의 기준은 아니란다.”

앤드류: “90세까지 아무 일 없이 조용히 사는 것보단

34세까지 살고 오래도록 기억되는 것이 훨씬 낫죠.”

아버지: “그래도 친구들은 날 기억해주지. 그게 핵심이다.”

앤드류: “우리 중에 찰리 파커 같은 친구는 없죠. 그게 핵심이에요.”


참된 환희는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룰 때라야 느낄 수 있는 법이다. 영화는 꿈을 위해 혹독한 노력을 쏟아도 성공으로 이어지지 않는 현실을 통해 성공 외의 중요한 가치들을 일러준다.


사제지간을 다룬 대부분의 영화는 훈훈하게 마무리된다. 반면 폭군 스승과 독기 품은 제자의 이야기를 담은 <위플래쉬>는 공포를 선사한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대중의 갈망과 현실을 두루 반영한 이유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위플래쉬> 속 열정은 무기력에 빠진 현대인에게 윤활유가 되어줄 것이다. 그러나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 성공을 목표로 삼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성공’만’을 위한 지나친 집착이 행복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님을 잊지 말자. 이 영화에는 열정만을 강요하는 자본주의의 이면도 담겨있어 현대인의 공감을 이끌어내기 충분하다. 궁극적으로 이 영화가 대중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타고난 천재가 아닌 평범한 우리들의 자화상인 앤드류가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그의 짜릿한 성장담을 통해 깨달은 바가 있다면 그동안 소홀했던 가치들에 눈을 돌려보자.

이전 03화 <태풍이 지나가고> 후기,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