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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쿠지로의 여름> 리뷰,
외로운 이들의 힐링 여행

“어른이란 말이야. 아이들을 위해선 희생하는 거란다.”

여름이 되면 다시 꺼내어보는 영화들이 몇 편 있다. 그중 하나인 <기쿠지로의 여름>은 기타노 다케시의 이면과 특유의 B급 유머를 즐길 수 있는 꽤 중독적인 작품이다. 나에게 이 영화는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돌아가는 잿빛 일상 속에 적정량의 청량감을 더해주는 소다수 같은 영화이기도 하다.



여름방학. 생각만으로도 달뜨게 만드는 단어다. 대부분의 아이들에게 방학은 즐거운 시간이다. 엄청난 양의 숙제가 쏟아지지만 그건 뒷전이다. 원없이 늦잠과 물놀이를 즐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해방감을 느낀다. 방학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는 나를 비롯한 어른들이 자주 내뱉는 말만으로 알 수 있다. “나도 (유급)방학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과는 달리 <기쿠지로의 여름> 속 마사오(세키구치 유스케)는 방학이 전혀 즐겁지 않다. 외로움이 배가되기 때문이다. 부모 없이 할머니와 단둘이 살아가고 있는 마사오는 방학이 아닌 때에도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아이다. 유일한 가족인 할머니조차 돈벌이 때문에 상당 시간 집을 비운다. 혼자 끼니를 때우는 일은 예삿일이다. 그나마 학기중에는 친구들과 함께하기라도 하지만 방학에는 친구와의 만남에 제약이 따른다. 축구공을 들고 친구의 집 앞에 찾아가지만 빈 집을 발견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집으로 택배가 온다. 거기에서 먼 곳에 일하러 떠났다는 엄마의 주소를 발견한 마사오는 그림일기장과 방학숙제를 챙겨 무작정 집을 나선다.




문제적 동행


아니나 다를까. 마사오의 여행길은 시작부터 불안하다. 동네 양아치들에게 붙잡혀 돈을 뜯긴다. 다행히 이 상황을 발견한 이웃집 아주머니가 마사오를 구제해준다. 이어, 평소와는 다른 낌새를 차린 아주머니는 마사오에게 행선지를 묻고 돈도 없고 위험하니 ‘누구와 같이 가면 어떠냐’고 제안한다. 그 ‘누구’는 전직 야쿠자였던 백수 남편 기쿠지로(기타노 다케시)다.


기쿠지로와의 동행이 마사오 혼자 떠났을 때보다 ‘더 위험’한 상황일 수 있겠다는 직감이 들었다면 당신은 ‘황금 촉’의 소유자다. 52세 기쿠지로는 문제적 남자다. 마사오를 돌보라는 명목으로 아내에게 받은 5만엔과 마사오의 전 재산 2천엔을 경륜도박에 쏟아 붓는다. 그것도 모자라 마사오를 도박에 끌어들여 선수를 맞히게 하는데, 그 덕에 1만7천엔이 조금 넘는 돈을 딴다. 그런데 그걸 또 술집에서 써버린다. 이 동행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9세 소년이 겪어서는 안 될 것들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어른이라면 어린이를 도박과 술집에 끌어들이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철없는 아저씨 기쿠지로는 제 욕망 채우기에 앞서 윤리는 안중에도 없다. 그는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고 욕지거리를 해대는가 하면, 당장 눈앞의 일을 해결하기 위해 남을 이용해먹는 가학적인 행동을 하는 것에 서슴지 않는다. 비싼 택시요금이 비싸다고 택시를 훔쳐 달아나기, 무일푼으로 호텔 수영장 이용하기, 도시락 훔쳐먹기, 타이어 펑크내기 등이 그것이다.


문제는 기쿠지로에서 그치지 않는다. 마사오는 공원에서 아동 성추행자를 만나 폭력을 경험하는데, 이는 평생 트라우마로 남을 치욕적인 사건이다. 이 외에도 길에서 만난 자칭 소설가, 오토바이족, 건달, 노출증환자 등도 웬만해선 접하기 힘든 ‘이상한’ 인물들이다. 이들은 사회 부적응자이거나 일반인의 범주에서 약간 벗어난 아웃사이더 성향을 띤다. 행동도 괴짜스럽다. 하지만 이들 덕분에 마사오는 잃었던 웃음을 되찾는다.




웃기는 아저씨들과 희망의 여성들


마사오는 하염없이 고개를 떨구던 소년이다. 하지만 이상한 아저씨들을 만남으로써 천진난만한 웃음을 짓게 된다. 영화의 시작점에서 볼 수 있었던 시무룩한 표정과 쓸쓸한 감정은 오간데 없다. 사실, 두 인물이 만난 사람들에 대해 마냥 ‘웃기다’는 수식어를 갖다 붙일 수만은 없다. 이른바 아웃사이더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이다. 기쿠지로도 이 범주에 포함된다. 마사오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것은 아니지만 부모로부터 버림받았다. 기쿠지로가 마사오에게 정을 느끼기 시작한 것도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은 처지라는 동질감에서 비롯되었다. 결국 마사오를 웃게 만든 사람들은 ‘버림받았다’는 공통분모 위에 놓인 분자들인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스스로를 정상 범위 내에 있는 것으로 자부하며 살아간다. 감독은 이들을 인사이더로 볼지 아웃사이더로 볼지에 대한 판단을 관객의 몫으로 던진다. 이렇게 공통점을 가진 사람들은 제2의 가족(집단)을 형성해 서로를 위로하기에 나선다. “어른이란 말이야. 아이들을 위해선 희생하는 거란다.”는 기쿠지로의 말처럼 길 위의 어른들은 온갖 방법으로 마사오의 웃음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렇다면 기쿠지로도 마사오를 웃게 만들어줄까. 아니다. 그의 역할은 ‘마사오 웃기기 프로젝트’의 지휘관이다. 길 위의 남자들을 지휘, 감독하면서 웃긴 상황을 연출한다. 마사오에게 있어 기쿠지로는 (의외로)감동적인 아저씨다. 마사오와의 동행을 중단하지 않고, 도중에 발생하는 무수한 사건들을 해결해주는 슈퍼맨 같은 존재다. 엄마와 마주하지 못해 울고있는 마사오를 위해 뚱보 오토바이족에게서 빼앗은 ‘천사의 종’과 함께 감동의 말을 전하기도 한다.


“이건 천사의 종이라는 거야. 힘들고 슬픈 일이 있을 때 이 종을 울리면 천사가 와서 도와준대. 한번 흔들어봐. 엄마 데려올지 아니?”


기쿠지로가 웃음을 주는 대상은 관객이다. 그가 다른 인물들에게 시비를 걸고 가학적인 행동을 취하는 모습을 보며 관객들은 웃는다. 타인의 고통을 비웃으면 안되는데, 웃긴 건 어쩔 수 없다. 이를테면 다른 사람을 물에 빠뜨리거나 아동 성추행자에게 들이대기, 타이어를 펑크내 도와주는 척하면서 차를 얻어 타겠다는 작전을 짜는 것이다. 이는 다른 사람을 곤경에 처하게 만들어 관객을 웃기는 하는 가학적 유희다. 그럼에도 크게 불쾌하지는 않다. 기타노 다케시의 전후작품들이 지닌 폭력성에 비하면 천진한 편이다.


<기쿠지로의 여름>에 등장하는 남성들이 마사오의 웃음을 책임졌다면 여성들은 마사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역할을 한다. 동반여행을 계획한 장본인인 이웃집 아주머니는 여정의 안전을 책임졌고 오렌지 저글링을 알려준 젊은 커플의 여성은 마사오의 가방에 천사의 날개를 달아준다.



“이건 천사 날개야. 새처럼 날아보는 거야.”




정신 차려보니 기쿠지로의 여행


처음에 우리는 이 영화가 마사오가 엄마를 찾아가는 여정으로 생각하고 봤을 것이다. 기쿠지로는 보호(동행)자에 불과한 존재라고 여겼을 것이고. 하지만 실상은 기쿠지로의 여행이기도 했던 것이다. 기쿠지로가 마사오에게 “일어나 꼬마야, 오늘 엄마 만나러 가야지.”라고 했던 것은 기쿠지로가 스스로에게 던진 말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는 어머니가 입원해 있는 휴양시설에 찾아가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후반부의 한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토록 보고 싶어했지만 다가가지 못하고 돌아서는 모습에서 그간 느끼지 못했던 짠한 마음이 든다. 좌충우돌 여행기의 끝에서 발견한 눈부신 장면이다.


여행은 선물꾸러미다. 발을 내딛는 순간 수만가지 ‘경험거리’들로 구성된 꾸러미를 얻게 된다. 이 꾸러미는 경험치를 적립시켜 여행자를 성장으로 이끈다. 그렇다면 <기쿠지로의 여름> 속 두 사람은 여행에는 어떤 선물들이 들어 있었을까. 먼저 두 사람 모두는 어머니를 보았다. 마주보고 체온을 나누는 것에는 실패하지만 오랜 시간 그리워해왔던 대상을 보게 된 것만으로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또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수영, 탭댄스, 저글링의 기술을 배우고 웃음을 얻었다. 어느 것보다 가장 큰 선물의 이름은 우정이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쌓인 밉고 고운 정은 나이를 초월한 우정으로 거듭났다. 또 이 둘은 잠시나마 서로에게 결핍된 가족구성원이 되어주었다. 얼핏 보면 두 사람은 부자지간처럼 보인다. 한편 마사오는 이번 여정을 통해 삶의 이면을 경험한다. 많은 이들과의 만남과 헤어짐을 통해 이별의 숙명을 깨달았을 마사오. 적어도 다른 아이들보다는 이별을 의연하게 맞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긴 여정을 마친 후, 기쿠지로와 마사오도 이별한다. 하지만 둘은 슬퍼하지 않는다. 소설가 리처드 바크(Richard Bach)의 말처럼 곧 재회를 앞둔 사이처럼 담담하게 헤어진다. ‘작별인사에 낙담하지 말라. 재회에 앞서 작별은 필요하다. 그리고 친구라면 잠시 혹은 오랜 뒤라도 꼭 재회하게 될 터이니.’




동심 어린 맑고 경쾌한 음악


사실 <기쿠지로의 여름>은 작품 자체보다 OST가 더 유명한 작품이다. 기쿠지로와 마사오가 놀이를 즐길 때마다 삽입되는 히사이시 조(久石讓)의 피아노 독주곡 ‘Summer’는 영화의 경쾌한 분위기를 북돋아준다. 여름날의 청량한 분위기를 온전히 담은 곡인만큼 군더더기 없는 곡명도 인상적이다. 이 영화에는 마사오가 겪는 외로움을 강조하기 위해 부감과 익스트림 롱 쇼트로 촬영된 장면이 많다. 텅 빈 운동장을 홀로 지키고 선 모습, 드넓은 해변에 덩그러니 남겨진 모습을 멀리서 비춘 카메라는 마사오를 극한의 고독으로 밀어 넣는다. ‘Summer’는 이 공허감을 채워주고 그림자로 드리워진 분위기를 전환시키는 역할을 한다. 기타노 다케시가 이 곡을 사용한 것은 가히 파격적이다. 다른 작품에서는 음악과 음향 등의 사운드 사용을 철저히 배제해왔기 때문이다. 이렇게 긴 곡을 반복적으로 들을 수 있는 영화는 <기쿠지로의 여름>이 유일하다.


누군가와 살 맞대는 것이 두려운 여름. 하지만 마사오는 타인과의 접촉이 간절한 소년이다. 그의 앞에 선물처럼 나타난 기쿠지로는 때에 따라 보호자와 친구가 되어준다. 버림받고 외면당해 외로움에 익숙한 사람들을 끌어 모아 서로를 위로하는 과정을 담은 <기쿠지로의 여름>. 그 어떤 영화들보다 맑고 순수하다. 하와이언 셔츠를 커플룩으로 맞춰 입고 햇볕을 피한답시고 큰 이파리를 머리 위에 꽂고 걸어가는 기쿠지로와 마사오의 모습은 세월이 흘러도 잊지 못할 것 같다. 두 사람의 여정을 보니 독일의 소설가 장 폴 리히터(Jean-Paul Richter)의 명언이 떠오른다.


‘인간의 감정은 누군가를 만날 때와 헤어질 때 가장 순수하며 가장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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