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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 사랑에 대한 사색,
<8월의 크리스마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준 당신께 고맙다는 말을 남깁니다’


살아가면서 죽음을 떠올리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오히려 피하거나 외면하고 싶은 대상이다. 더욱이 여름날과 닮은 청춘은 죽음에 대해 ‘나와는 먼 이야기’로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 그 어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은 결코 외면할 수 없는 대상이다. 당장 내가 겪을 상황이 아닐지라도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죽음을 목도한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자연스럽게 죽음이 도처에 있다는 사실을 인지해간다. 인간은 살아가는 동시에 죽어가는 존재다. 역설적이지만 사실이다. 탄생과 죽음으로 삶을 여닫는 존재는 인간 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의 운명이다. 동물과 꽃, 심지어 하늘의 태양과 달도 태어나고(뜨고) 죽는다(진다). 영원한 것은 없다.


이 관점에서 보면 <8월의 크리스마스>의 제목도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단편적으로 보면 현실성이 전혀 없는 단어들의 조합이다. 하지만 탄생과 죽음, 낮과 밤이 각각 인간과 하루를 완성하는 조합으로 본다면 여름과 겨울이 하나의 제목에 포함된 것도 계절의 순환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주인공 정원(한석규)과 다림(심은하)은 한여름에 만난 청춘이다. 주차단속요원인 다림은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새내기 사회인이다. 반면 30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정원은 생을 마무리 지어야 하는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나이만 보면 푸르디푸른 시기에 서있지만 처한 상황은 전혀 다른 남녀. 이 둘은 사랑을 이어갈 수 있을까.




정원


정원은 흔히 봐왔던 시한부 인생의 인물들과는 조금 다른 캐릭터다. 곧 죽을 운명이지만 불안은 커녕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일상을 살아가는 그. 이유는 어린시절부터 죽음을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내가 어렸을 때 아이들이 모두 가버린 텅 빈 운동장에 남아 있기를 좋아했었다. 그곳에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고 아버지도, 그리고 나도 언젠가 사라져버린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일찍이 어머니의 여읜 탓에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아온 정원은 자신에게 닥친 죽음에도 태연하다. ‘초원사진관’을 운영하며 온화한 미소로 손님을 맞이하는 그에게는 죽음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 만취 상태로 파출소에서 소란을 피우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조용히 흐느끼는 두 장면이 죽음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전부다. 죽음마저 초월한 그는 웬만한 상황에도 동요하지 않는다. 하지만 다림을 알게 되면서 달라진다.



다림



다림이 일 때문에 초원사진관을 자주 찾게 되면서 두 사람은 가까워진다.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지만 제 처지를 아는 정원은 소극적인 자세를 취한다. 오히려 다림이 적극적이다. 나이와 결혼여부, 생일을 먼저 묻고 서울랜드에서 일하는 친구가 공짜표를 주기로 했다면서 은근슬쩍 데이트 신청까지 한다. 밤길을 거니는 동안 팔짱을 먼저 끼는 등 스킨십에 있어서도 적극적이다. 다림이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정원의 상황을 몰랐기 때문이다. 서로의 마음이 깊어짐에도 불구하고 정원은 자신의 상황을 끝까지 고백하지 않는다. 때문에 다림은 더 애가 탄다.


초원사진관은 자주 문이 닫힌다. 정원이 검진을 받으러 갈 때는 ‘출장 중’이라는 푯말이 걸리고 갑자기 쓰러져 입원한 동안에는 장기간 비워진다. 그럼에도 다림은 하염없이 기다린다. 다림의 성씨는 ‘기’가 아닐까 예상해본다. 기다림.



만남과 이별



정원은 어린 시절부터 ‘영원한 것은 없다’고 믿어왔다. 사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어릴 때 책에다 사진을 끼워 둘 정도로 열렬히 좋아했던 동생의 친구 지원(전미선)과의 사랑도 끝이 난 것처럼 말이다.


‘세월은 많은 것을 바꿔놓는다. 서먹하게 몇 마디를 나누고 헤어지면서 지원이는 내게 자신의 사진을 지워달라고 부탁했다. 사랑도 언젠가는 추억으로 그친다.’


정원의 독백처럼 시간의 흐름은 많은 것을 바꾼다. 시간에 따라 사람과 풍경, 사물이 변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시간과 함께 퇴색한다. 육체는 늙어가고 사랑은 식어간다. 그래서 우리는 가장 젊고 생생한 순간을 기억하고 간직할 요량으로 사진을 찍는다. 하지만 소중한 시간을 포획한 실체도 간직한 사람의 중요도나 예기치 못한 실수로 사라질 수 있다. 이렇게 우리는 자주 이별을 경험한다. 나 역시 많은 생명의 죽음과 친구, 연인과의 이별을 경험했고 언젠가 될지는 모르지만 세상과의 이별을 앞두고 있다. 살아가면서 죽어가는 것처럼 타자와의 만남은 이별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별을 각오하고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은 없다.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내 옆에 있는 사람과의 이별이 죽을 만큼 싫다고 생각하면 현재의 관계를 잘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지만, 우리는 늘 잃은 뒤에 후회한다.



사진


사진은 순간을 기록하기 위한 수단이다. 우리는 1초 후면 사라질 지금 이 순간을 기록하고, 영원히 간직할 목적으로 사진을 찍는다. 사진의 특징은 인간의 기억과 육체와는 달리 (잃어버리거나 지우지 않는 한)영원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일까. 변하고 사라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인간은 사진의 불멸성에 의존하곤 한다.


사람은 불멸의 욕망을 안고 살아간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모든 사람의 육체는 소멸한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 남은 자들의 기억속에 살아남는 것이다. 이 존재의 영속성을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으로 흔적(이름)을 남기기 위해 분투하며 살아간다. 아무리 열심히 살았다 한들 역사에 기록될 이름을 남기고 떠나는 자는 소수에 불과하다. 그에 반해 사진은 차별을 두지 않는다. 누구나 찍고 간직할 수 있다.


정원이 찍어온 사진들을 보면 공통점이 있다. 찍는 목적은 각양각색이지만 사진기 앞에 앉은 모든 사람들은 환한 미소를 짓는다. 죽음을 앞둔 이도, 사랑에 빠져 생애 가장 행복한 순간을 보내는 이도 사진기 앞에서는 최대한 밝은 표정을 취한다. 찌푸린 표정은 타인에게 좋은 모습으로 기억될 수 없기 때문이다.


조용히 죽음을 준비하는 정원은 자신을 기억해줄 이들을 위해 사진을 남긴다. 나들이 후 거나하게 취한 친구들과 한껏 폼을 잡은 채 한 컷, 활짝 웃는 다림의 사진 한 컷, 그리고 자신의 영정사진까지. 정원이 스스로 영정사진을 찍는 모습은 가족사진을 찍은 며칠 뒤 홀로 영정사진을 찍기 위해 초원사진관을 찾는 할머니의 장면과 함께 애처로움을 유발한다. 어머니의 죽음, 학창시절의 사랑처럼 모든 것이 사라지고 부질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누군가의 마음 속에 기억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사진을 남기는 정원의 모습에서 미미한 욕망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것은 다림의 증명사진이다. 정원에게 있어 다림은 생애 끝에 선 남자를 웃게 해준 마지막 사랑이다. 또, 사랑의 영속성을 믿지 않았던 정원에게 새로운 관점을 부여한 인물이기도 하다.


‘내 기억속의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 추억으로 그친다는 것을 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준 당신께 고맙다는 말을 남깁니다.’


눈 내린 겨울. 다림은 자신의 증명사진이 크게 걸린 초원사진관 앞에서 활짝 웃는다. 기다려온 정원은 없지만 그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행복을 느꼈기 때문이다. 사진을 간직한다는 것은 대상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편지



사진이 표면의 기록이라면, 편지는 내면의 기록이다. 영화에는 다림이 정원의 사진관 문틈에 끼워둔 여러 장의 편지, 정원이 다림에게 전하지 못한 편지가 등장한다. 정원이 아버지를 위해 비디오기기 작동법의 순서를 남기는 것도 편지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편지는 그 어떤 소통방식보다 상대에게 가닿는 농도가 짙다. 적어도 뱉는 순간 휘발되는 말보다는 가시화된 글의 효력이 크다. 특히 애틋한 마음을 전하고자 할 때 편지만큼 큰 힘을 발휘하는 것도 없다. 대부분의 경우, 편지를 쓰는 사람은 수신인이 눈앞에 없는 부재의 상태에서 기록한다. 보이지 않는 상대를 떠올리고 그를 향한 마음을 쓰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편지는 낭만의 산물이다.


정원과 다림도 그랬다. 정원이 오랫동안 보이지 않을 때, 다림은 정원의 공간에 마음을 눌러 담은 편지를 밀어 넣는다. 편지에는 어떤 내용들이 적혀 있었을까. 애인도, 애인도 아닌 ‘썸 타는’ 사이임에도 다림은 정원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많았나 보다. 다림이 다량의 편지를 쓴 이유는 불확실함 때문이라고 짐작해본다. 모호함은 생각의 꼬리를 물게 하기 때문이다. 확실하지 않은 관계, 영문을 알 수 없는 부재는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된다. 마음만 먹으면 만날 수 있었던 사람을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오는 헛헛한 마음을 편지로라도 채우고 싶었던 다림의 모습이 사랑스럽다.


다림의 편지는 시작(희망)을 위해 쓰여졌다. 무엇이 됐든 정원과 좋은 인연이 되고자 하는 바람이 쓰여 있을 것이다. 반면 정원의 편지는 끝맺음(절망은 아니지만)을 위해 작성됐다. 감미로운 메시지가 담겨있지만 마무리를 위한 것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두 편지의 중심에는 사랑이 버티고 서 있다. 서로 다른 입장에서 썼지만 결국 하나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 영화 속에서 편지는 중요한 코드다. 본래 제목이 ‘즐거운 편지’였다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제목은 황동규 시인의 첫 시집 《어떤 개인 날》에 실린 동명의 시 제목을 옮기려 했지만 1997년에 개봉된 영화 <편지>를 감안해 지금의 제목으로 바꾼 것이다.


시 ‘즐거운 편지’의 내용 역시 <8월의 크리스마스>처럼 모순적이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외롭고 견디기 힘든 시간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사랑을 기다림으로 승화시킨 작품으로, 사랑은 언젠가 추억으로 그칠 것이라고 믿는 정원과 하염없이 그를 기다리는 다림의 모습 모두를 엿볼 수 있다. 누군가와 사랑을 하면 자주 보고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늘 붙어있는 것은 힘들다. 사랑은 떨어져 있을 때도 서로를 떠올리고 그리워하는 마음이다. 편지는 그 마음이 온전히 밴 것이고.



8월’은’ 크리스마스



뜨거운 여름날 만난 정원과 다림은 겨울이 되어서야 비로소 서로의 마음을 표현하고 확인한다. 창창한 나이에 죽음을 맞이하는 청년, 끝을 알면서도 시작하는 사랑, 죽을 것을 알면서도 죽을 힘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들. 이처럼 우리 삶에는 수많은 모순들로 뒤섞여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이유는 모순을 넘어선 기적 같은 일이 탄생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 때문이다. 생에 끝에 시작된 새로운 사랑은 누군가의 입장에선 잔혹할 수 있다. 하지만 정원의 입장은 달랐다. 영원히 한 사람을 마음에 품고 떠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자각과 고마움을 느꼈다. 정원과 다림은 이별했다(이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들의 끝은 진정한 의미의 끝이 아니다. 정원이 가슴 속에 다림을 품었듯, 다림도 정원을 잊지못할 것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꽃핀 사랑을 담담한 시선으로 풀어낸 것이 특징이다. 멜로드라마로 한정 짓기에는 아쉬울 만큼 삶에 대한 고찰이 담겨있는 작품으로, 삶 곳곳에 시한(時限)이 스며있다는 것을 일러준다. 생명과 마찬가지로, 사랑과 일에도 끝이 있다는 명심하게 만들어주는 이 영화. 빛나는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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