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저씨>를 몇 년이 지나 다시 보았다. 다시 시청하면서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이지안 보다 박동훈이다. 이지안은 본명 이지은으로 독보적인 자기 싸움에 승리자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도 음악적 장르에 최고의 스타로 자리매김되었다. 박동훈 역을 맡은 이선균의 매력은 영화 <끝까지 간다>의 숨 막히는 연기 때문이었을까. 이선균의 발음은 어느 때 너무 빨라서 대사가 잘 안 들릴 때가 있다. 한국 사람이면서도 한국어 리스닝 능력을 의심해야 할 때도 있다.
개인적으로 드라마 등장인물 이지안은 내게는 헤어진 지 5년이 된 딸아이를 연상하게 했다. 등장인물의 나이와 딸이 아마 비슷한 또래일 것이라는 생각. 어떤 힘겨움에도 버티고 죽지 않고 자생력을 가진 캐릭터. 딸이 보고 싶어서 아마 이지안이라는 캐릭터에 사로잡혔을지 모른다.
이 드라마는 JTBC의 아버지의 병을 다룬 <해피엔딩>이나 박찬욱 감독 이성민 주연의 <기억>처럼 현실적 갭이 크지 않고 직장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일상에서 가능한 발상이면서 허구에 대한 가미가 적다는 점이다. 물론 '감청'은 아마 현실적으로 무지 어렵거나 불가능한 면이 다분하다. 어플을 깔아서 감청라는 일은 어느 정도의 해킹능력이 필요하면서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점에서 <나의 아저씨>는 있을 수 있고 가능한 내면의 감성을 실타래에서 실을 뽑아 수놓은 한 벌의 멋진 옷을 만들듯 극적 요소를 잘 가미했다.
김원석 감독의 작품 <시그널>은 장현의 '미련'(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곡)을 배경으로 과거와 현재의 연결 즉 타임슬립 드라마로 영화 <햄HAM>을 떠올린다. <나의 아저씨>의 작가는 박해영이다.
<나의 아저씨>는 현실에서 부딪히며 갈등하는 일과 가족에서 지닐 수 있는 멍든 애잔함을 사랑과 갈등으로 수채화처럼 담백하게 담았을 뿐만 아니라 자칫 외설과 불륜으로 노골화된 <밀애>나 <아내의 자격>, <부부의 세계> 작품과 달리 '인간애'로 실상 과도한 '말초적 자극'이 아니라 담백하고 있을 법한 감성에 휘둘리지 않는 절제를 끝까지 놓지 않았다는 점이다.
특히 '안아 주세요!'라는 이지안의 제안에 박동훈은 외도나 불륜으로 치닫지 않고, 자신의 아내가 불륜이면서 자신에게 이른바 '사망선고!'나 다름없는 상황이면서도 이지안에게 선을 넘어서지 않은 점이 오히려 더 '우아한 야함'을 만들어 낸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받거나 자극을 받고 싶어 하는 현대인들은 노골적으로 '까놓고 말하기'를 좋아하는 성향이 감정에서 긁지 말아야 하고 노출하기를 꺼려하는 부분이 비 노출되기를 바라지만 노출될 수밖에 없는 묘한 변명과 합리화로 '맨 살'을 보이거나 '속 것'까지 다 보여 오히려 아름답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다고 노출이 적어서 좋다는 뜻이 아니라 노출을 하지 않았으면서도 마음과 영혼이 충분이 노출되었고, 이로 인한 형이상학적 채색이나 갈등적 요인에 대한 무지개 색채의 인간의 풋풋한 감정을 인물의 행위와 과다한 언어가 아닌 '떨리는 침묵'으로 담아놓았다는 점에서 미학적 향연을 엿볼 수 있다.
이지안이라는 독특한 캐릭터는 현실에서 무엇을 대변하려는 것보다 '주어진 상황'이 그 사람을 침묵하게 하고, 관계에서 마음을 닫아야 하고, 얼음 같은 현실에서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는 냉혹한 현실에서 '아주 어린데도 너무 많은 경험이나 직면한 현실의 무방비한 노출로 강하거나 면도칼처럼 날이 선 언어의 논리적 정당성'을 디딤돌로 하여 '모순되거나 이익 우선 주의, 패거리 이해득실'을 넘어서려 한다.
예컨대, 회장이 이지안에게 사과를 할 기회를 잃었기에 이지안을 무조건 찾으라는 점, 동훈에게 밥 한 끼를 하고 싶지만 거절당하는 늙은 회장이 바로 이 점을 대변한다. 무엇이 더 중요하고 무엇이 더 공정하고, 무엇이 더 인간다움인가를 반증하고 있는 셈이다.
비탈진 언덕길, 눈이 내린다. 우리가 계단을 밟고 올라가야할 길목, 날은 집은 기울어가고 금이가고, 마음이 구닥다리가 된듯 새것이 아닌 '헌 사람'이 되어버린 느낌일지도 모른다. 힘겨운 비탈길을 오르는 길을 돌아와도 누가 기다려 주는 것도 아니다. 할머니(손숙)은 말도 하지 못하고, 냉골의 방에서 죽을 날을 기다리는 듯 하다.
저마다 강하고 내새울만한 것도 많을 테지만 마음 속 한 켠에 곪고 멍들고 정리되지 않는 지난 날의 뒤엉켜버린 실타래를 둘둘 말아서 버리지도 못한 채 움켜지며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풀려고 하면 겁이 나기도 하고 버리려 하니, 그것마저 없다면 죽을 것 같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목과 새카맣게 어둠을 담고 있는 방안에 불을 켜는 것 조차 겁이 날 때가 있다. 이지안은 불도 켜지 않고 허기를 채우기 위해 전기포트에 맥심커피 두 봉지를 넣고 마신다. 달달한 위로와 지침을 지안은 잘 버텨내고 있다.
박동훈 역 이선균 우리 시대 아저씨는 자칫 따분한 존재, 아재 개그, 술이나 마시고 일이나 하고, 돈이나 집에 갔다 주어야 하는, 그리고 돈을 벌지 못하는 아저씨는 놀림받거나 버려져야 하는 잉여인간들로 간주된다. 아줌마들이 실속파이고 큰 손이고 우악스럼과 억척에 대명사라면 아저씨는 술이나 마시고 깽판이나 부리는 존재로 여겨져 왔다.
이들은 돈을 벌거나 사냥을 하러 나가는 가장 위험한 세상과의 노출에 방치되면서도 일찍 들어오지 않고, 술을 마시고, 집에 와서 큰 소리나 치는 '납득가지 않는 짐승'취급을 받아왔다.
드라마와 같이 어린 나이의 상사로부터 까이고, 작은 실수에도 아랫사람을 치고 올라오는 직장인의 현실에서 그들은 견디지 못해 겨우 한 숨 돌리기 위해 '담배'를 피우면 공공장소에서 담배를 피우는 몰상식한 범죄자로 간주될 뿐 아니라 술주정이나 부리는 한심한 난봉꾼이기 십상이다.
염령와 걱정도 불륜으로 몰아가고 무작정 조금만 빈틈을 보여도 모든 남자는 성추행과 성범죄자들이다. 남자들은 모두 잠재적인 범죄자로 인격살인이 가능하다.
둘은 누가 봐도 납득이 가지 않는 나이. 프랑스 대통령의 25살 연상녀, 트럼프 20살이 이하 아내, 먼 나라 이야기이지 우리나라가 아니다. 그렇고 그런 의심의 여지가 충분한 사이.
한국은 연령에 대한 계층이 넘어서면 큰일 나거나 죄인들 같이 싸늘한 시선을 던지며 수군거린다.
마녀사냥식 수다와 의식적 계층에 대한 징글징글한 고정의식이나 고리타분한 게릴라성 군중성 편향의 매장주의에 대한 한계이다. 싸움은 즐겁게 구경하지만 왜 싸우는지는 관심 없는 것과 같은, 구경거리식 기쁨에 만연이고 비난하는 것에 대해서만 한 목소리를 내는 모순적 편향성일지도 모르며, 거기에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학습되고 전염되고 오염 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나 자신 조차도.
아저씨들의 푸대접은 현실이다. 그들은 늙어가거나 '상해가는 고깃덩어리' 취급을 받으며, 여권의 신장으로 인한 역차별을 받을 수 있다. 남자들이 집에서 쫓겨나면 갈 곳이 없다. '여자들은 연약하다'가 아니라 '여자들이 오히려 강할 수 있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여성가족부는 있어도 남성가족부는 없다.' 남자도 약할 수 있고, 아저씨들이 실직을 당했을 때 가족에게 아무리 헌신을 했다고 해도 가족으로부터 추방당한다. 여자가 바람을 피우는 것을 알게 된 광분한 남편이 분에 못 이겨 물건을 던지면 그 남자는 폭력 아빠일 뿐이고, 그 사람을 폭력으로 신고하고 여성보호소에 숨어버리면, 그 사람이 아무리 가족을 위해 헌신했다 해도 폭력만 부각시키면, 불륜한 여자는 국가로부터 보호를 받는다.
쉽게 화내는 사람일수록 심리적으로 내면이 연약할 가능성이 많으며 성장기 학대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지만 부모나 학교 선생에게 두들겨 맞으며 살았던 세대, 엄격한 체벌로 학습된 경험이 몸에 베인 그들의 습성이 문화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자식이 도둑질을 해도, 아내가 바람을 피워도 화내거나 분노할 것이 아니라 모르는 척해야 가정이 바로 서고, 큰소리치지 않아야 그 자리를 겨우 버틸 수 있는 '미묘한 부적응'에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담배 피우는 중학생이든 고등학생을 아저씨들이 뭐라고 하면 아이들에게 맞아 죽는다. 바른 말을 하지 말고 모른 척 방관해야 한다.
<나의 아저씨>에서 동훈은 속으로 멍들었으면서도 말을 좀처럼 하지 않는 속으로 '앓아 멍들어야 제대로 된 사람'이다. '그 속이 오죽할까'는 어머니의 대사로 보호된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행복할 권리가 있다. 나의 아저씨는 먹이사슬과 과열경쟁에서 밀려난 아저씨들의 실상과 그들에 대한 편견과 속물근성이 모두가 그런 것만은 아님을 밝혀낸다. 부분적으로 나마. 정희네에서 버려진 그들의 아지트에서 술 마시며 즐기는 것이 '아저씨들의 속물'이 속물이 아니라 정겨운 배려로 발전할 수 있음을 동훈의 형으로 제시한다. 고학력 청소부 동훈동생, 그 사람을 여배우, 청소 할아버지의 따뜻한 밥상은 그들이 얼마나 정답고, 진지하고 이해심이 넓은 면에 있다는 장면의 증거들이 <나의 아저씨>에서 제시된다.
인정받고 사랑받으려면 먼저 사랑하고 배려해주어야 한다. 아저씨들도 아기였고, 소년이었고 아직 아버지 과정을 모두 겪어보지 못한 순진한 사람일 뿐이다.
고마워. 거지 같은 내 꼴을 다 알고도 이해준 네가 고맙다. 나처럼 어린애가 나 같은 어른이 불쌍해서. 나 그거 마음 아파서 못살겠다.
2018년 봄에 방송된 이 드라마는 "내가 어떤 앤지 알고도 나랑 친할 사람이 있을까?"라고 생각될 만큼 우리 시대 냉대받고 버려진 삶들이 현실을 극복해 가는 드라마이다. 무대는 화려할지 모르겠지만 무대뒤는 어쩌면 내오지고 싶지 않은 자신을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초라하고 모자라고, 모멸감으로 세상에서 숨어버리고 싶은 그런 마음을 갖을 수 있다.
별은 낮에도 밤에도 떠있지만 밤에는 그 별이 보인다. 힘들고 어려울 때 그 사람은 그 사람의 진면목과 아름다운 모습이 더욱 빛날 수 있을 것이다. 이 드라마는 화려함나 나 잘났다는 자랑이 아니라 나는 못났지만 그래도 세상을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드라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