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영훈 Feb 20. 2018

그대는 대학(원)에 입학했다

도시와 예술의 관계에 대한 연구

문화·예술분야 종사자가 도시계획을 공부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예술학이나 경영, 예술경영 등의 전공으로 진학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올해로 문화·예술기관에서 5년째 일하고 있는 나의 경우에도 처음 대학원 진학을 결심했을 땐 해당 학과들을 우선적으로 고려했었다. 그러나 스스로의 관심과 적성, 그리고 문화·예술업계에 대한 경험을 돌이켜보면서 충분한 시간을 고민했다.

학부시절 건축을 전공하고 도시를 공부하면서 여러 가지 현상을 건축과 도시적인 맥락에서 바라보는 시각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건축적, 도시적 관점으로 문화·예술기관에 근무하면서 몇 가지 아쉬움을 느꼈다. 가장 아쉬웠던 점은 문화·예술정책과 시설운영의 미시적인 접근이었다. 그 결과 문화·예술정책과 시설은 현재 독립적이고 산발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지금까지 도시의 계획에서 문화·예술은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고 문화·예술은 도시에 크게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도시와 문화·예술은 밀접하게 관계 맺지 못했고, 그래서 우리의 도시와 삶에서 문화·예술의 역할이나 영향은 미미했다.

나는 이러한 문제가 도시와 문화사회학적 이해의 부재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문화·예술정책을 수립할 땐 도시적인 맥락을 고려하고, 지역의 문화·예술을 운영할 땐 주민과의 소통방안을 건축적인 방식으로 고민해야 한다. 그래서 점적으로 존재하는 문화·예술정책과 시설들이 도시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선이 되고 면이 될 때 보다 많은 지역과 사람들의 삶에 문화·예술이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문화·예술은 도시와 도시의 사람들이 영위하는 것이다. 도시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만 적절한 문화·예술정책을 제안하고 시설을 운영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도시를 공부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배움과 변화에 대한 갈증으로 대학원 진학을 결정하긴 했으나, 대학(원)이라는 정규 교육과정이 추가로 필요한가에 대한 자문(自問)의 과정이 있었다. 그리고 스무 살에 읽었던 홍세화씨의 글을 다시 한번 상기했다.



그대는 대학에 입학했다.

한국의 수많은 무식한 대학생의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지금까지 그대는 12년 동안 줄 세우기 경쟁시험에서 앞부분을 차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영어 단어를 암기하고 수학 공식을 풀었으며 주입식 교육을 받아들였다. 선행학습, 야간자율학습, 보충수업 등 학습노동에 시달렸으며 사교육비로 부모님 재산을 축냈다. 그것은 시험문제 풀이 요령을 익힌 노동이었지 공부가 아니었다.

그대는 그동안 고전 한 권 제대로 읽지 않았다.

그리고 대학에 입학했다. 그대의 대학 주위를 둘러보라. 그곳이 대학가인가? 12년 동안 고생한 그대를 위해 마련된 '먹고 마시고 놀자'판의 위락시설 아니던가. 그대가 입학한 대학과 학과는 그대가 선택한 게 아니다. 그대가 선택당한 것이다. 줄 세우기 경쟁에서 어느 지점에 있는가를 알게 해주는 그대의 성적을 보고 대학과 학과가 그대를 선택한 것이다. '적성' 따라 학과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성적' 따라, 그리고 제비 따라 강남 가듯 시류 따라 대학과 학과를 선택한 그대는 지금까지 한 권도 제대로 읽지 않은 고전을 앞으로도 읽을 의사가 별로 없다. 영어영문학과, 중어중문학과에 입학한 학생은 영어, 중국어를 배워야 취직을 잘할 수 있어 입학했을 뿐, 세익스피어, 밀턴을 읽거나 두보, 이백과 벗하기 위해 입학한 게 아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어학원에 다니는 편이 좋겠는데, 이러한 점은 다른 학과 입학생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인문학의 위기'가 왜 중요한 물음인지 알지 못하는 그대는 인간에 대한 물음 한 번 던져보지 않은 채, 철학과, 사회학과, 역사학과, 정치학과, 경제학과를 선택했고, 사회와 경제에 대해 무식한 그대가 시류에 영합하여 경영학과, 행정학과를 선택했고 의대, 약대를 선택했다.

한국 현대사에 대한 그대의 무식은 특기할 만한데, 왜 우리에게 현대사가 중요한지 모를 만큼 철저히 무식하다. 그대는 민족적 정체성이나 사회경제적 정체성에 대해 그 어떤 문제의식도 갖고 있지 않을 만큼 무식하다. 그대는 무식하지만 대중문화의 혜택을 듬뿍 받아 스스로 무식하다고 믿지 않는다. 20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읽지 않은 사람은 스스로 무식하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지금은 대중문화가 토해내는 수많은 '정보'와 진실된 '앎'이 혼동돼 아무도 스스로 무식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대의 이름은 무식한 대학생. 그대가 무지의 폐쇄회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그대에게 달려 있다. 좋은 선배를 만나고 좋은 동아리를 선택하려 하는가, 그리고 대학가에서 그대가 찾기 어려운 책방을 열심히 찾아내려 노력하는가에 달려 있다.


홍세화 / 한겨레신문 기획위원,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저자



이 글은 죄의식처럼 나의 대학생활을 지독하게 따라다녔었다. 그리고 대학(원) 입학을 앞둔 지금 다시 한번 곱씹어보게 된다. 나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의 이름은 무식한 대학(원)생, 무지의 폐쇄회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작가의 이전글 두 개의 국가, 하나의 도시 -홍콩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