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의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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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바가 죽었다.
13년을 같이 살았다. 심바와 어떤 존재보다도 많은 시간 피부를 맞대고 살았다. 심바의 사인은 구강암이었다. 턱의 좌우대칭이 맞지 않는 걸 발견하고 황급히 동물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았다. mri에서 심바의 턱뼈는 뿌옇게 보였다. 구강암으로 턱뼈 대부분이 허물어졌고, 수술이 무의미하다고 했다.
고양이의 시간은 인간보다 6배 빠르게 흐른다. 심바는 머지않아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나는 마음으로 계속 울음을 토했다. 이별을 준비하기에 남은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심바는 피를 토하며 꾹꾹이를 했다. 지난 13년간 심바한테 물려서 생긴 흉터들이 욱신거렸다. 나는 심바가 죽을 때까지 매일을 울었다. 심바는 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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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가 죽었다.
스무 살에 만난 친구였다. 죽음을 문자로 알았다. 처음 소식을 접했을 때 아무 느낌 없었다. 그저 친구의 죽음이 씨앗으로 마음 한편에 심어졌다. 황급히 장례식장으로 이동하는 길에 씨앗은 싹을 틔우고, 조금씩 자랐다. 몸이 떨렸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친구의 부모님은 나를 보고 오열했다. 마음에 상실의 꽃이 활짝 피었다. 친구의 죽음으로 마음에 피어버린 서글픈 꽃이 시들기까지 며칠간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일과 공부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직접 관을 운구하고, 화장하는 모습을 목격하니 비로소 꽃은 지고 열매가 남았다. 마음속 깊은 곳에 그리움의 열매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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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연거푸 겪은 슬픔에 이따금씩 멍해졌다. 운전하다가 문득 눈물이 났다. 공유할 수 없는 슬픔에는 위안도 없었다. 몰입이 필요했다. 그래서 올해 악착같이 공부했다. 내게 몰입이 위안이었고 남은 자의 책임이었다. 살점을 잃고 넝마로 감쌌다. 영원한 상실을 부질없이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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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사회학과 박사과정 입학 첫해였다. 평소 사회학에 관심이 있었으므로 공부가 수월할 줄 알았는데 오판이었다. 전공으로서의 학습은 다른 것이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공부했다. 마르크스와 베버, 짐멜과 뒤르켐 같은 고전 사회학자와 르페브르, 카스텔, 하비, 로간, 몰로치 같은 도시사회학자의 책을 읽었다. 새로운 분야에서 나는 수영을 할 줄 모르고 물에 빠진 아이였고, 누구도 구해주지 않았다. 발버둥 치며 조금씩 스스로 익혔다.
문화경제학회에서 나의 석사 논문에 대하여 발표했고 최우수논문상을 받았다. 도시계획을 전공하면서 지역문화진흥법의 제도에 대해서 쓴 논문이 문화경제학회에서 인정받은 것이다. 문화예술과 도시, 사회의 관계에 대한 연구에 확신을 갖게 되었다. 또한 석사논문과 문화경제학회 발표를 계기로 서울시 연구과제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다. 여러 교수님, 박사님들과 연구의 현장을 경험했다. 연구가 정책이 되는 것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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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회사 근속 10년이 되었다. 주변에 한 회사를 10년간 다닌 사람이 별로 없다. 돌이켜보면, 회사를 다니면서 날카로웠던 성격은 무뎌졌고 논리와 체계에 대한 강박은 유연해졌다.
공연제작의 현장에서 3년, 기관의 운영 전략 수립에 2년, 조직 관리에 5년의 시간을 쏟았다. 3년간 무대감독으로서 공연의 제작 현장을 경험했다. 2년간 경영평가 보고서를 작성하고, 기관 혁신 계획을 수립하며 시야를 넓혔다. 그리고 5년간 인사담당으로서 인사제도를 설계하며, 지속가능한 조직을 고민했다.
아직까지 공연과 전시의 기획과 유통과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기관의 핵심사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기관의 운영과 조직의 관리에서 현장과 괴리가 발생한다. (건축을 빌어 표현하자면) 기관의 운영과 조직의 관리가 조감도라면, 사업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것은 도면이다. 도면이 없는 조감도는 공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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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파도가 거친 한 해였다. 내면에서 요동치는 파도가 밖으로 흘러넘치지 않으려면 외면의 방파제는 높고 단단해야 했다. 그래서 올해의 나는 참으로 말이 없었다. 슬프고 힘들수록 고요했다. 가혹한 상실의 고비마다 소중한 사람들이 있었다. 심바를 보내고 홀로 남은 예삐를 안고 있으면 잠시나마 위안을 얻었다.
예측가능성에서 행복을 느낀다. 올해는 예측할 수 없는 일로 가득했다. 누군가는 남았다. 남은 자는 노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