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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나B Sep 05. 2021

사과가 좋다고 말해서는 안돼!

이제 그만


우리 가족에게는 어떤 음식이 좋다고 쉽게 말해서는 안 된다. 그랬다간 평생 그것만 먹어야 할 수도 있다. 평생 먹을 자신이 있다면 말해도 좋다.


중학교 때쯤 명절에 우연히 먹었던 사과가 참 맛있었다. 나는 그 순간에 느낀 대로 기분 좋게 말했다. 


"요새 사과가 맛이 좋네!" 


이 한 마디의 영향력은 굉장히 컸다. 하필이면 가족들은 사과를 좋아하지 않았다. 엄마는 사과의 사각거리는 느낌이 싫다고 했고, 아빠와 언니들은 본래 과일을 찾아먹는 편이 아니었다. 또 하필이면 사과는 명절에 자주 들어오는 과일이었고, 제사 때 항상 쓰는 과일이었다. 우리 집에 생기는 모든 사과는 내 이름이라도 붙어있는 듯이 다 내 것이었다. 내가 말 한마디 잘못해서, 사과를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 모르겠다. 사과를 좋다고 한 마음은 당연히 사과'만' 좋다는 게 아니라, 사과'도' 좋다는 것이었다. 모든 사과를 나 혼자 다 먹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본의 아니게 몇 년 동안 사과를 독점해서 먹었다. 버텨보던 나는 결국에 질려버렸다.


"이제 사과 싫어, 안 먹어!"


나는 가족들에게 분명히 말했다. 하지만 가족들은 내가 싫다고 한 말은 자꾸 까먹고, 계속 내게 사과를 줬다. 내가 이제 사과 안 먹는다고 했는데, 왜 자꾸 주냐고 물어도 매번 비슷한 대답이 돌아왔다. 


"사과 좋아한다고 했잖아?"


우리 가족들이 기억력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대체 모르겠다. 사과를 더 이상 먹지 않겠다고 선포한 이후에도 가족들은 꽤 한참 동안 계속 나를 위한 사과를 챙겨두곤 했다. 우리 가족들의 사랑을 과소평가하고, 말을 함부로 내뱉은 내 잘못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우리 가족은 누구에게나 평등했다. 나만 이런 일을 겪은 게 아니었다. 


큰 언니는 딸기를 좋아했었다. 많이 사 와서 먹고 남은 걸 냉동실에 넣어두고, 언 딸기를 얼음처럼 씹어 먹기도 했다.


"옳다구나!"


가족들의 머릿속에는 "큰 언니=딸기"가 박혔다. 그렇게 지금의 큰 언니는 딸기를 찾지 않는다. 작은 언니는 콘칩을 좋아했었다. 엄마가 과자를 콘칩만 사 왔다. 역시나 인간은 학습하는 동물이니까. 지금의 작은 언니가 콘칩을 먹는 걸 본 적이 없다. 우리 가족은 돌아가면서 한 번씩 당하고 나서야, 실수를 하지 않게 되었다. 


사과에 질린 이후로, 정말 오랫동안 사과를 안 먹었다. 




몇 주 전에 퇴근해서 야채 과일가게 앞을 지나는 길이었다. 습관처럼 좌판을 둘러보는데, 사과가 한 봉지에 2천 원 밖에 안 했다. 묵은 사과인지 겉면이 깨끗하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 싸니까 오랜만에 먹어보고 싶었다. 그 가격이면, 상태가 안 좋은 몇 개를 버리더라도 괜찮을 테니까.

 

남은 사과

 

사과가 한 봉지 안에 십여 개 정도 들어있었다. 냉장고 서랍에 넣어두고, 매일 한 두 개씩 먹었다. 살 때 예상한 대로 약간 푸석한 오래된 사과맛이 났다. 그래도 꽤 달콤했다. 칼로 껍질을 깎아먹는 게 귀찮긴 했지만, 상큼해서 나쁘지 않았다. 그래, 이 맛에 사과를 좋아했었다. 


아메리카노와 사과

가장 쉽게 먹는 방법, 사과 티타임.

보통은 아침 식사를 하고, 후식으로 커피와 함께 먹었다. 처음에는 사과가 복숭아나 바나나처럼 단 맛이 강한 게 아니라서, 쌉싸름한 커피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먹다 보니까 단맛이 적당해서 커피의 풍미를 해치지 않는 느낌이었다. 커피에 달콤한 음식만이 어울리는 건 아니다. 각각 맛있으면 함께 먹어도 맛있다.


사과 토핑 요거트

사과 토핑을 올린 요거트.

과일을 그냥 먹는 게 심심하게 느껴질 때는 평소 좋아하는 요거트에 토핑으로 얹어서 먹었다. 플레인 요거트에 사과 한 두 조각을 잘게 잘라 넣었다. 그대로 먹을 때도 있었고, 단 게 생각날 때는 꿀을 조금 뿌렸다. 요거트는 더 달콤했고, 사과는 더 상큼했다. 부드러운 요거트와 맛있는 과일의 조합은 언제나 맛있을 수밖에 없다.

오버나이트 오트밀

애플 시나몬 조합의 오버나이트 오트밀.

전날 밤에 오트밀이 살짝 잠길 정도로만 우유나 두유를 부어놓고, 다음 날에 부드러워진 오트밀 위에, 토핑을 얹어먹었다. 그래놀라를 먼저 올리고, 사과를 작게 잘라 올렸다. 그다음에는 좋아하는 시나몬 가루를 넉넉히 뿌리고, 꿀 한 바퀴를 둘러서 마무리했다. 향긋한 시나몬 향이 사과와 잘 어우러지고, 사과의 아삭함, 그래놀라의 바삭함, 꿀의 달콤함이 즐거웠다. 의외로 든든했다.


사실 며칠 전에 사과를 또 샀다. 운동하고 집에 오는 길, 횡단보도 앞에 과일 트럭이 있었다. 트럭 옆면에 '햇 홍로 사과' 푯말이 붙어있었다. 추석 밑이라 햇사과가 나올 철인 것이다. 사과의 색깔이 물감으로 물들여놓은 것처럼 새빨갛게 예뻤다. 그림으로 그리려고 해도 이처럼 오묘하게 그라데이션을 넣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이전에 산 묵은 사과와 달리 표면도 매끈했다. 큰 사과 다섯 개는 만원이었고, 작은 사과 여덟 개는 5천 원이었다. 그 모습에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홍로 사과가 뭔지도 모르면서 5천 원짜리 한 봉지를 사 왔다. 


홍로 사과

'홍로 사과'가 뭐길래, 그냥 햇사과라고 안 써놓고 홍로 사과라고 강조해놓았는지 궁금했다. 집에 와서, 인터넷으로 검색했다. 홍로는 사과 중에 알이 굵고, 색이 선명하게 붉은 품종이며 선물이나 차례상을 차릴 때 보기에 좋은 걸 선택하는 소비자를 겨냥해서 개발된 것이었다. 추석 때 먹는 사과 대부분이 홍로라고 말이다. 먹어보니 푸석푸석하지 않고 아삭거리면서 싱싱했다. 단맛이 강하지는 않았지만, 정말 갓 딴 것 같은 싱싱함에 기분 좋았다. 


'제철 과일을 먹는 맛이 이런 거구나.'


이래서 제철 음식을 먹으라고 하나보다. 자연의 생생함으로 내 삶도 함께 생생 해지는 것 같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가을의 맛이 참 좋다.


가족들에게 이제 다시 사과를 먹는다고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앞으로도 말할 생각이 없다. 어렵게 끊어낸 과거를 다시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 항상 조심해야 된다. 언제든지 과거가 현재로, 현재가 과거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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