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니나B Oct 10. 2021

비 오는 날에는 전을

나의 우주


거실에 앉아서 TV를 보던 엄마가 말했다.


"비 오니까, 점심에 전 부쳐 먹을까?"


엄마는 날이 쌀쌀하거나 비가 오는 날이면, 전을 부쳤다. 집에 도토리 가루가 있으면 도토리전을, 부추가 있으면 부추전을, 감자가 있으면 감자전을, 아무것도 없을 땐 김치전을 만들었다.


가장 자주 해주던 건 감자전이었다. 주로 애호박과 부추가 들어갔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했다. 엄마가 감자전에 애호박을 넣을 때는 올해 호박이 잘 됐다고, 향긋한 부추를 듬뿍 넣었을 때는 몸에 좋다고, 김치전에 매콤한 김치를 썰어 넣을 때는 우리 김치가 맛있다는 말을 더했다. 그렇지만 마무리하는 말은 항상 '많이 먹어라.'였다.


흔치 않은 만큼 별미였던 게, 도토리전이었다. 보통 도토리전에도 애호박을 넣었는데, 간혹 잘게 썰린 오징어채를 넣었을 때가 제일 독특했다. 도토리향이 진했고, 쫄깃한 반죽에 짭짤한 오징어채가 들어가서 씹는 맛이 더 좋았다. 묘하게 단맛도 났다. 엄마가 해준 전 중에서 최고였다. 자주 생각나지만, 먹을 기회가 적다.


자글자글 전이 익는 소리가 들리고, 기름 냄새가 솔솔 나기 시작하면, 뭘 하고 있었든 저절로 신경이 부엌으로 쏠렸다. 배가 고프면 엄마가 부르기도 전에 젓가락을 들고 앞에 앉았다.


"엄마, 배고파!"


프라이팬 앞에 서있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며, 어미새의 모이를 기다리듯이 목 빠지게 입맛을 다셨다. 엄마는 접시 위에 뜨끈 뜨근한 전을 올리며, 아직 방에 있는 나머지 딸들을 불렀다.


엄마표 애호박 감자전


언니들과 상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밖에서 빗소리가 창문을 타고 넘어와, 거실의 TV 소리와 만났다. 빗소리와 섞인 웅얼거리는 TV 속 사람들 소리가 마치 우리 집에 온 손님처럼 자연스럽게 집에 머물렀다. 엄마는 항상 간장이 없어도 된다고 했지만, 나는 꼭 간장을 찾았다. 들기름과 깨를 살짝 섞은 간장에 전을 찍어먹으면 훨씬 더 맛있으니까. 어떤 전이든 뱃속이 따뜻하고 묵직해지도록 많이 먹었다. 엄마가 전을 부치기 무섭게 빠르게 사라졌다. 몸이 더워져서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다행히 그날이 선선한 날이라면, 시원한 바람이 들어와서 이마에 맺힌 땀을 식혀주기도 했다.




엄마에게 말만 하면, 요리가 뚝딱 만들어졌다. 딸들이 부엌에서 느릿느릿 꼬물거리면서 요리를 하고 있으면, 무척 답답해한다. 방에 앉아서 기다릴 듯하다가도, 부산스럽게 덜그럭거리는 소리에 이내 밖으로 나온다.


"앓느니 죽지!"


한숨을 쉬며 딸을 슬쩍 옆으로 밀어내고, 대신 요리를 해준다.


'엄마도 요리를 못할 때가 있었겠지? 엄마도 엄마가 어려울 때가 있었겠지?'


내 기억 속의 엄마는 언제나 요리를 잘했다. 내 기억 속의 엄마는 항상 엄마였으니까. 내가 본 적 없고 알 수 없는 시간 속에서는 엄마도 나 같았을 것이다. 나처럼 요리가 어설프고, 당신의 엄마가 해주는 음식을 먹었을 테지. 그런 엄마가 분명히 있었을 텐데, 상상이 되지 않는다. 엄마가 엄마로 사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닌데도, 모른 척 당연하다는 막연한 마음으로 안정감을 얻으며 산다.


어릴 때 나의 우주는 엄마였다. 그 우주에서 벗어나서, 나만의 우주를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나는 엄마의 우주 속에 있는 것 같다. 엄마를 중심으로 자전하고 공전하고 있다. 나이를 먹고 엄마에게서 떨어져 나와 멀어졌지만, 계속 전해지는 빛으로 살아가고 있다.


'비 오는 날에는, 전이 먹고 싶다' 같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생각처럼, 내게는 '엄마 밥은, 맛있다'라는 문장이 자동 완성된다. 아마도 엄마가 오랫동안 수많은 요리를 해서, 갈고닦은 음식 솜씨 덕분이겠지. 엄마가 쌓아온 시간이 만들어낸 음식을 먹으며 무럭무럭 잘 자랐다.


비가 오면, 문득 옹기종기 모여서 전을 먹던 때가 생각난다. 그 딸들은 이제 뿔뿔이 떨어져서 살고 있다. 비가 오면 각자의 다른 창문으로 밖을 본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비가 오는 수많은 날들 중 한 번쯤은 같이 떠올리지 않을까?


'비 오니까, 엄마가 만든 전이 먹고 싶다.'


이전 14화 브런치를 먹으면, 우아해지는 기분이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