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처럼 짧은 봄
"소금사막에 다녀오셨군요."
나는 그의 책상 위에 놓인 사진을 보고 말했다. 봄에는 없던 사진이었다. 원근감이 느껴지지 않은 하얀 공간에 펄쩍 뛰고 있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아..... 예......"
그는 당황한 듯 말꼬리를 흐렸다.
"차 한 잔 드리겠습니다."
책상 위에서 전기 주전자가 쉭쉭 거리며 끓고 있었고, 그는 투명한 잔 속에 마른 목련꽃 몇 잎을 떨어뜨렸다. 누렇게 색이 바랜 어린 목련꽃 잎이 지리산의 첫 봄을 추억해내듯 느리게 가라앉았다. 자신의 찻 잔에도 꽃잎을 넣은 그의 옆얼굴 위로 늦은 오후의 햇빛이 자디잘게 쏟아져 내렸다.
"봄부터 지금까지 쭉 잘 마셨습니다."
"아..... 네..."
이번에는 내가 말꼬리를 흐렸다.
목련꽃잎 차는 지난봄 지리산에 사는 경혜네 갔다가 사 온 것이었다.
"봄이 되면 이 곳 사람들은 아직 봉우리도 채 벌어지지 않은 어린 목련꽃을 따서 차를 만들어. 순식간에 꿈처럼 사라지는 봄을 추운 겨울에도 계속 기억하려는 것처럼......"
벌써 십 년 전 도시를 버리고 지리산으로 들어간 경혜는 그렇게 만든 차를 지인들에게만 팔고 있었고,
그중 하나는 내 책상 위에 그리고 또 하나는 김영우 선생의 책상 위에 있는 것이다.
"이번 상담은 봄에 한 번 가을에 한 번 있는 그런 의례적인 상담이 아닙니다."
그의 얼굴에 갑자기 음영이 뚜렷해지는 것 같았다.
지난봄 수지가 육 학년이 되고 나서 학교에선 상담 신청서가 날아왔다. 육 학년이 시작되고 한 달쯤 지난 후였다. 5학년 겨울방학에 초경을 시작한 이후 수지는 낯설었고 또 거칠었다. 그 애 머릿속에 어떤 잡념이 오고 가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 애의 유일한 책임자였다. 바쁘다는 핑계로 한 번도 학교를 찾지 않았던 나는 6학년 담임을 만나게 되었다.
김영우 선생은 가느다란 은테 안경을 끼고 좀 마른 듯한 체구에 잘 다려진 체크 셔츠에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광고회사 직원이라면 더 어울릴만한 외모였다. 나는 빈 손이 어색해 경혜네 서 가져온 목련차를 손에 쥔 채 6학년 3반 교실로 들어섰다. 회사를 조퇴하고 왔지만 이미 늦은 오후였다. 늦은 오후의 봄 햇살이 아직 서늘한 교실을 비추고 있었다.
"상담하고 싶으신 내용이 있으신가요?"
예상보다 말투도 눈빛도 부드러웠다.
"수지는 작년까지 제가 알던 수지가 아닌 것 같아요. 무슨 얘길 해도 눈빛이 험악해지고 제게 말대꾸를 하네요. 아실지 모르겠지만 정말 착한 아이였는데......"
"혹시 짐작 가실 만한 이유라도?"
그의 눈빛 때문이었을까? 나는 친정엄마에게도 못했던 얘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그 애를 낳고 심한 산후 우울증에 시달렸어요. 한 동안 아이를 안기도 힘들었었죠. 결국엔 수지가 아직 어릴 때 이혼까지 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수지는 작년까진 아무 문제없는 아이처럼 보였고 잘 자라 주었다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때 나는 보았다. 그의 눈에 물기가 가득 고였고 아슬아슬하게 맺혀 있던 물기가 흘러내리던 것을. 그는 안경을 벗고 책상 위에 있는 티슈로 눈물을 닦아냈다. 그런 선생은 아니 그런 남자는 내 생에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