넋두리
지하철에 유난히 사람이 많아서 책을 펼 여유도 없이 좌측 문 앞에 자리 잡았다. 그런데 바로 다음 역 인가 행색이 남루한 (노숙.. 하신 듯?) 분이 타더니 바로 내 앞에 문을 바라보며 선다.
'노가다나 하는 거지'
손엔 아무것도 안 들었는데 귀에 이어폰을 하셨나? 전화통화를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바로 코앞에서 자꾸 중얼중얼 작지 않은 소리로 내뱉는 말이 계속 반복되는데 통화가 아니고 그냥 혼잣말이었다.
'나라가 노가다가 없어서 망하는 거지 학자들이 없어서가 아니라고. 학자는 수준이 떨어져서..'
일하러 가시는 중일까? 막일을 하러 나가기엔 좀 늦은 시간이고.. 근데 계속 이럴래나? 자리를 옮길까?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인지 악취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다행히 몇 정거장 안가 그분이 내리는데 겨우 마음이 놓였다. 요즘 하도 이상한 일들이 많으니까.. 무슨 사연이 있길래 저렇게 다 들리게 혼잣말을 하는 걸까? 대놓고 더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도 많이 봤지만..
'저렇게 되지 않으려면 공부 열심히 해야 해' 라며 아이에게 청소 노동자를 가리키며 훈육하는 비열? 한 엄마를 그린 삽화가 떠올랐다. 우리는 힘든 일을 하는 사람을 목격하면 동정심과 경계심 중에 어떤 것이 우선할까? 세상은 불안이 점점 영혼을 지배해 가는 것만 같다. '저렇게 되지 않으려면..' 나 역시 삽화의 부모처럼 대놓고는 아니어도 아이들에게 비슷한 경각심을 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젊은이들의 미래를 위협하는 것은 건강한 삶에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것조차 노력해도 얻기 힘든 현실일 텐데 미래를 빼앗긴 젊은이들이 현실의 불만을 극우로 치달아 결국 또 기득권 세력에게 이용당하기도 하는 요즘.. 과거엔 이러다 한 번씩 싹 다 갈아엎고 죽여 없애는 오버홀 Overhaul을 (혁명)을 격었다지..
큰 아이의 수능이 끝났다.
결과야 어떻든 이젠.. 내려놓으려 마음먹는다. 아니 사실은 훨씬 이전부터 밀어내려 했다. 조용히 새끼 곁을 떠나는 어미 재규어처럼..
거구에 가까운 체격에 수염까지 거칠한 수컷 대장 밑에 숨죽이고 지내야 하는 우리 아이들에겐 집은 어떤 공간처럼 느껴졌을까? 어렸을 때 아버지가 퇴근하고 돌아오시면 나는 정말 불편했었다. 우리 아버지는 지금 나처럼 학업에 대해 잔소리를 하는 분이 아니었는데도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하거나 말 한마디 잘 못 응대했다가는 혼쭐이 나는 건 비슷했었다.
여리고 해맑은 저 표정을 계속 지켜줄 순 없던 걸까. 아이가 사춘기가 될 때 즈음 사춘기의 아이보다 더 질풍노도로 아이를 생존 경쟁으로 몰아세운 나는 결코 좋은 아빠라는 소릴 듣지 못할 것이다.
예상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한 불안. 그로 인해 나머지 50%의 유전자에 대한 이기적인 불신. 부끄러워해야 할거 같지만 나는 당시 너무도 당당히 불의를 보고 나서듯 항거? 했다. 가장 어려웠던 시기를 까맣게 잊은 듯 파렴치하게도 아이들이 없었더라면 견딜 수 없었을 시절들을 모두 잊은 듯.. 나는 시류에 휩쓸려 3명의 아이들에게 평생 못 갚을 빚을 진 어리석은 가장일 뿐이다.
Let it be
폴메카트니가 비틀즈 해체를 앞두고 불안에 휩싸였을 때 꿈에 어머니 mary가 나타나서 하신 말씀이 let it be였다고 한다. '그냥 둬라.. 잘 될 거야' 어려운 때라도 순리에 맡기라는 의미로 만든 노래를 뜻도 모르고 아무 생각 없이 중학교 때부터 따라 불렀는데도 그게 잘 안된다.
Let it be 간단해 보이지만 얼마 전 들은 '오죽하면 그러겠니'처럼 이 역시 어른이 되어야 할 수 있는 말 같다. 말은 쉽지만 난 여전히 어렵다. 어디까지 그냥 두어야 하고 어느 대목에 바로잡으려 나서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나서야 하는지. 왜 뜻한 바와는 다르게 흘러가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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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두서없이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낸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