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맛 vs 성취의 맛, 당신의 입맛은?
때로는 대충, 또 어쩌다 가끔은 꼼꼼히, 어찌 됐든 매일 기록하려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식단 일기다. 그저 먹은 것에 대한 시시콜콜한 것들을 적는다. 언제 누구와 무엇을 먹었고, 그 음식이 왜 먹고 싶었는지, 먹고 나니 기분이 어떤지, 재료는 어땠는지, 하는 생각 따위를 적는다. 하루는 가지튀김을 먹고 나서 쫀득한 찹쌀 반죽과 따끈한 온기를 품은 가지가 어우러지면서 만들어 내는 쫄깃쫄깃 하고 담백한 식감, 끈적한 소스가 미끄러져 내리며 느껴지는 달콤새큼한 맛에 대해 구구절절이 적었다. 제대로 식혀 먹지 않아 혀를 데어 느낀 고통, 기왕이면 맥주 한잔을 곁들여 먹었다면 더 좋을 뻔했다는 아쉬움도 덧붙였다.
이런 식이다. 속으로 한번 생각하고 훌훌 털어 버려도 될 일을 굳이 글로 적는다. 위가 소화를 끝낸 음식들을 기어이 머리로도 소화시킨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기록이 쌓여 갈수록, 왠지 모르게 더부룩하고 답답하던 일상이 한결 개운하고 편안해지는 기분이 든다. 먹고 사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니, 먹고 사는 것이 달라졌다.
‘먹는 것’이 ‘사는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먹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너무 많았으니까. 좁디좁은 취업문을 뚫는 것, 스스로 밥벌이하며 살 능력을 갖는 것, 성공에 한 발짝 더 다가가는 것, 회사에서 인정받고 일의 성과를 내는 것, 매일같이 야근을 해서라도 눈앞에 쌓인 일을 해치우는 것, 남보다 뒤처지지 않게 틈틈이 자기 계발을 하는 것… 일상의 맛보다는 성취의 맛에 중독되어 있었다. 성취를 자주 맛볼수록 일상의 맛도 업그레이드될 거라 믿었다. 하지만 성취의 맛은 오래 지속되는 것이 아니었고, 일상에서 맛보는 음식의 가격이 높아졌다고 해서 행복감이 높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삶의 다양한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입맛이 둔해졌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무얼 먹고 사는지는 나에게 그다지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었다. 먹는 건 그저 한 끼 때운다는 의미에 가까웠다. 열량은 높으면서 영양가는 하나도 없는 음식, 화학조미료와 각종 첨가물로 버무려진 음식, 중독성 있는 달고 맵고 짠 자극적인 음식들로 내 몸을 채웠다.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나 자신에게 너무 미안하다. 히라마츠 요코가 쓴 『산다는 건 잘 먹는 것』을 읽으며 더욱 그런 마음이 들었다. 이 책의 재료는 자연을 간직한 채소의 맛, 알맞게 구운 짭조름한 생선의 맛, 마법 같은 레몬즙 한 방울의 맛과 같은 사소한 먹거리의 맛이다. 눈으로 활자를 따라가며 맛을 음미하다 보면 무심하게 지나쳤던 ‘일상의 맛’이 섬세하게 느껴지고, ‘먹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된다. 작가는 ‘손가락 사이를 삭삭 빠져나가는 모래’와 같은 일상생활 중에서 먹는 행위 자체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강조하기 위해, 먹는 일을 ‘흘러가는 날들에 쐐기를 박는 일’로 표현했다.
잃었던 일상의 맛은 다행히 식단 일기를 쓰면서 서서히 예민해지고 있다. 하찮은 끄적임이긴 하지만 매일매일 반복되는 먹는 일을 신경 쓰고 가꾼다는 것 자체로 사는 게 조금 더 즐거워졌다. 잘 먹는 것이 비싼 것, 귀한 것, 기름진 것을 먹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듯이, 잘 사는 것 역시 돈을 많이 버는 것, 유명해지는 것,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굳이 나처럼 먹는 것을 적지 않더라도, 무심결에 흘러가는 일상을 아주 잠깐이라도 붙잡았다가 떠나보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부지런한 내 친구는 잠들기 전 꼬박꼬박 일기를 쓰고, 사진 찍기 좋아하는 다른 친구는 매일 같은 시간에 사진을 찍는다. 반복적인 일상을 무심히 지나치지 않고, 삶의 자잘한 부분까지 신경 쓰고 정성을 기울이는 것. 그게 잘 먹고 잘 사는 것 아닐까. 매일 일상을 촘촘히 들여다보지 않았다면 일상의 맛은 모른 채 지금까지 성취의 맛만 좇고 있었을 거다. 자, 그러니 이제 오늘의 맛을 한번 기록해 볼까.
[신간 에세이] <삶의 무게를 줄이는 방법> 출간 기념 연재였습니다.
다음 글, <삶의 무게를 줄이는 방법> 8화. 자기만의 속도
12/3(월)에 연재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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