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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박 Dec 05. 2020

초라함

짝사랑하던 직장 동료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졌다.

나는 그에게 아무 관심이 없었다. 약간은 촌스러운 옷차림과 살짝 위로 솟았지만 주눅 든 듯 앞으로 굽은 어깨, 전혀 꾸미지 않은 더벅한 스타일의 검은 머리. 게다가 연년생의 내 남동생과 동갑. 뭣도 없으면서 연하의 남자는 남자로 보이지 않는다고 한창 우길 때였다.


미국 보스턴대 출신의 O차장님과 우리 회사와 콜래버레이션 할 명품 P브랜드를 방문하기 위해 홍콩으로 출장을 갔다. 1박 2일간의 짧은 출장 동안 유창한 영어 실력과 프로페셔널한 프레젠테이션을 하시는 O차장님의 업무 모습에 일개 과장이던 나는 엄청난 감동을 받고 있었다. 긴 회의를 마치고 저녁을 먹으며 O차장님은 P과장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왜 자꾸 그의 얘기를 하시는지 모르고 그러냐며 듣기만 했다. 그때부터 문제는 시작되었다.


서울로 돌아와 P를 다시 보니 생각보다 큰 키에 부리부리한 이목구비를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은 어눌하고 늘 자신을 별 게 아닌 사람이라고 말하는 폼이 꽤 겸손해 보였다. 어느 회식에서 다른 선배들의 질문을 통해 확인한 사실은 강남에서 꽤나 잘 살다가,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경기도로 밀려나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가정사에 대한 자격지심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공부를 못했고 책을 싫어하고 그래서 그다지 좋은 대학을 나오지는 못했지만, 카투사 출신의 영어는 아주 조금 할 수 있는 실력이었다. 경제적 형편과 달리 학력이나 지적인 측면의 열등감은 있어 보였다. (어느 컨설팅 회사의 영어 프레젠테이션을 듣던 회의실 저편에서 안경을 끼고 꾸벅꾸벅 졸던 그를 보며 실망감이라는 것을 느낀 적도 있긴 하다.)


아직도 그에 대한 상세한 묘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업무 관련 요청이나 질문을 하기 위해 그가 자리로 찾아올 때마다 내 얼굴은 발그레 상기되곤 했다. 홍콩에서 O차장님은 본인의 목적을 달성했다. 본인이 보기에 나와 P가 꽤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고, 불행히도 그는 내게 먼저 액션을 취했다. 아마도 O차장님은 내 마음만 움직이면 일이 성사되리라 예상했던 듯하다. 그러나 P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고 내 마음만 요동치기 시작하면서 나는 오랜 기간 그를 짝사랑하기 시작했다.


그 시간은 상당히 길었다. 다른 사람을 만나보려 애써보기도 했지만 도통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3-4년은 시간이 지난 것 같다. (사실 이렇게 긴 시간이 유지된 데에 그의 지나친 친절과 선을 긋지 않는 태도도 한몫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용기를 내어 그에게 고백했고 좋은 누나 동생으로 지내고 싶다는 거절을 당했다.


사실 내 마음을 받아줄 거라는 기대로 고백한 건 아니었다. 그저 이 지리멸렬한 짝사랑에 종지부를 찍고 싶었을 뿐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기보다는 누군가로부터 사랑받고 싶었다. 그러나 그 후로도 한참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만큼 내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이제 내게 사랑이란 없는 건가 포기하던 순간,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지냈다. 그러나 그 또한 유효기간이 있는 만남이었는지 지금 나는 다시 싱글이다.


싱글의 삶에 불만은 없다. 도리어 꽤 만족하며 살고 있다. 결혼한 사람들이 갖게 되는 함께하는 안정감이나 자녀라는 새로운 가족으로 인한 기쁨에 대한 미련 또한 없다. 그에 반해 내 삶에는 원하는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자유와 귀찮은 의무가 없는 홀가분함이 있고 나는 그게 더 좋다.


그래도 늘 각자의 자리에서 좋은 것이 늘 좋지만은 않다. 특히 내가 꽤 좋아하던 남자가 결혼을 해서 아이를 갖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볼 때는 더욱 그렇다. 한 때는 내가 무척 갖고 싶어 했던, 그 모든 것을 갖춰 나가는 그에게 축하하고 부럽다는 인사를 전한 뒤 느껴지는 초라함이 당최 가시지를 않는다.


그의 결혼과 그의 아내의 임신 사실을 알았던 날 내 마음속의 설움이 아직도 남아있다. 왜 남들은 늦어도 원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그렇게 원하던 아이도 갖고 행복하게 사는가. 나는 왜 그가 갖는 것을 갖지 못하는가. 그렇게 친한 친구를 붙들고 눈물을 글썽이며 하소연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 감정을 빨리 지우려는 노력은 나를 더 힘들게 할 뿐이다. 그냥 지금은 내가 초라해 보여도 어느 순간 그가 나를 보며 초라하게 느낄 순간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쩌면 그는 아직도 그보다 좋은 학교 출신의, 책을 좋아하는 나를 보며 초라함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것은 그대로 있는데, 같은 것을 내가 어떤 방향에서 어떤 마음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리고 안다고 해서 그게 곧장 내 삶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안다.


- 넷플릭스 시리즈 "더 크라운" 중에서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케네디 대통령과 영부인 재클린의 명망이 높던 시절,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도 나와 다르지 않았다. 본인보다 지성과 미모가 뛰어난 재클린 케네디에 뒤지지 않기 위해 드레스의 허리를 졸라매기도 했다. 재클린은 사실 케네디 대통령과의 불화로 괴로웠고, 그의 죽음으로 인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해 보이던 이 여성은 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미망인이 되었다. 그 장면을 TV를 통해 보던 엘리자베스 여왕은 깨닫는다. 불행이란 게 그렇다고. 더 큰 불행이 닥치면 그때야 비로소 실은 행복했다는 걸 깨닫게 된다고.


나는 아직도 좀 초라함을 느낀다. 나는 여전히 싱글이고, 내가 갖지 못했던 그는 여전히 내가 갖지 못한 가정을 잘 꾸려나가고 있다. 더 이상 초라해지지 말자라던가 나는 그것 말고 가진 것들이 있으니 초라해질 필요가 없다는 결심을 하고 싶지는 않다. 지금 당장 그 감정을 잊는다 해도 다시 그 감정이 돌아올 수 있음을 알고 있다. 그냥 잠시 이 감정이 내 안에 머물다 나가도록 두자. 그것도 때가 되면 다른 감정에 밀려 떠나지 않겠는가. 가끔씩 한동안 초라해지더라도 잠시 그것과 함께 시간을 버티어내자.


#찌질 #초라함 #싱글 #짝사랑 #더크라운 #thecrown #넷플릭스 #netflix #클레어포이 #clairef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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