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있다.
잠이 들어있는 시간은 며칠째 줄어들었지만
이렇게 개운하고 상쾌한 느낌은 오랜만인 것 같다.
퇴사를 하겠다고 마침내 선언했다.
서른을 넘긴 후부터 손에 쥔 것들을 놓을 용기는 자꾸 줄어들었다. 납득하기 어려운 상태를 긍정 반, 무기력 반으로 합리화시키며 유지하는 것을 깨부수는 데 참 오래 걸렸다. 내게 고통을 준 것은 아무도 아닌 나 자신이었다. 떠나지 못한 것은 '나'였으므로.
내 가치에 대한 그들의 평가는 내 자존감에 계속해서 상처를 내고 휘저었다.
사실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데 무엇이 그렇게 겁이 났던 걸까. 굶어 죽을 일은 오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암세포를 떼어낸 듯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준비를 하고 천천히 다시 정비하면 기회는 온다. 나는 그것을 어떻게든 만들어 낼 수 있다. 나에 대한, 그런 믿음이 생겼다.
우선은,
책을 가득 쌓아두고 읽고 싶다.
좋아하는 운동을 느긋한 마음으로 가서 즐기고 싶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요리에 취미는 없지만 잘할 수 있는 요리를 몇 가지 더 늘리고 싶다. 상그리아도 만들어 냉장고에 채워두고 싶고, 하루에 한 시간 정도는 언어를 공부하고 싶다. 프랑스어나 스페인어가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꽤 오랫동안 나는 하고 싶은 것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슬프게 했었다. 지금, 이상하게도 나는 하고 싶은 일들을 하나씩 조심스럽게 적어 내려가고 있다.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그랬구나 싶었다.
마침내 끝을 낸 나 자신이 참 맘에 든다. 진실로 기쁘다.
이제 다시 시작을 준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