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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낮잠 Oct 12. 2020

반성문

허무한 세계

물론 능동적인 허무주의에 가깝지만, 언제부터 이런 허무한 세계를 스스로 짓게 되었는지는 스스로도 알고 싶었다. 타고난 성향일 수도 있겠지만 반복되는 시간표처럼, 때가 되면 어김없이 살아있어서 펑펑 울고 싶었다. 그의 노트에는 이런 문장들이 적혀있었다.


920181

어정쩡한 평범함, 평범한 하루에 가까운 날들.

나 자신이 특별하지 않게 느껴지는 일들이 늘어갈수록 나는 나 자신을 죽이고 싶다.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짙고 강렬한 우울함은 내 영혼을 잠식하고 이럴 바에야 존재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결론에 닿고 만다. 특별함에 대한 지나친 욕구와 욕망들이 나 스스로를 절망으로 몰아가는 것 같다. 결코 특별해질 수 없는 인생이다. 무기력한 회색 소파가 놓인 거실에서 오늘도 울었다.


920182

그녀는 내가 매번 죽고 싶다고 글을 쓰는데 이상하게 그 글들은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살아있는 순간마다 생생하게 닥치는 감정들 때문에 죽음에 더 가깝다고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삶과 죽음은 하나로 붙어있으니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920183

달이 자꾸 아래로 아래로 내려왔다. 인생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내일을 또 살아가야 했다.


920184

나는 스스로를 너무 힘들게 한다.


920185

하염없이 우울해진다.

색이 바랜 하늘처럼.


920186

구름이 밤의 옷을 입고 태양이 막 사라진 하늘은 검은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빽빽이 서있는 건물의 창문들이 노란빛으로 가득 차 올랐고 곡선으로 뻗은 도로에는 일렬의 빛들이 각자의 리듬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920187

시간의 흐름은 직선이 아니고 한쪽 방향도 아니며 상하로 좌우로 섞여 있는 것 같다. 어느 날 아침, 커튼을 걷지 않고 그대로 침대에 누워 저녁을 맞이했다. 모든 것이 평온하고 조용했다. 일상은 멈추지 않고 걸음을 계속한다. 나는 아무래도 반항하지 않은 채로 끌려가고 있었다. 어떻게 되기를 바라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920180

무엇이든 다시 좋게 생각하기로 한다. 매번 물거품에 쓸려가지만 다시 잘해보자고.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나는 아직도 나를 달래는 것에 서툴다. 오늘도 어제도 사실은 행복했다고 믿고 싶다.


그가 제일 좋아하는 단어는 제로라고 했다. 플러스와 마이너스는 결국 동일한 무게로 계산될 것이고 그렇게 지어진 허무한 세계에서 계속 지지 않고 살아갈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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