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스퍼드행 열차는 놀란 미꾸라지처럼 급하게 철로를 미끄러져 갔다. 서서히 속력을 올리자 건물이나 담장은 열차를 따라 고개가 휘어지고, 창문은 깨질 듯이 일그러졌다. 폭우 속 갈대처럼 고개를 가누지 못하고 위태로운 몸짓이었다. 하지만 난 이 몸짓이 무기력해 보이지 않고, 오히려 수백 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견딘 삶 자체인 것처럼 느껴졌다. 하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회색 구름은 솜 뭉텅이처럼 군데군데 엉성했다. 새하얀 빛깔은 가장자리 틈새를 엷게 물들이다가 끝자락에 맺혀있었다. 그러더니 수정 기둥에 어른거리는 상(像)처럼 산산이 깨지고 말았다. 차창 밖 모든 형태며 빛마저 뒤틀리자, 마치 시간이 느려지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열차는 목적지를 향해 선로를 틀었다. 그러자 빛이 가득 쏟아지고, 폭신한 시트의 촘촘한 털을 하나하나 비추며 쓸어 올렸다. 내 손가락도 시트의 결을 따라서 쓸어 올리며 버석한 감촉을 느껴보았다. 찰나의 빛은 온기를 남겨두었다. 내 손도 누군가에게 따뜻했을까. 분명 다정하지만, 때론 무심했으며 그마저도 잊었을 터이다. 그럴때면 밀려오는 회한에 입술을 지그시 감쳐물곤 했었다. 마침 무심한 창가에는 거칠고 성긴 물걸레 자국이 눈 결정처럼 나타났다.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잊혀지고 마는 것들이다. 한 줄기의 빛도 내 검지를 어루만지더니 점차 위로 올라갔다. 어깨 재봉선을 선로처럼 따라가더니 비집고 나온 실밥에서 멈춘다. 누군가와 관계가 끊어질 때면, 실밥 같은 모난 감정만 남겼겠지 싶었다. 또다시 열차가 방향을 바꾸자 이번엔 햇살이 내 얼굴을 때리고, 미간을 찌푸린 얼굴 하나가 창가에 얼비쳤다. 이게 내 얼굴일까. 낯설지만 6살 무렵의 어린 얼굴처럼 보인다. 느려진 시간은 과거의 나를 데려왔는지도 모른다. 문득 시트의 온기, 과거의 나까지 연관 없던 것들은 잊혔던 기억으로 점철되었다. 그리곤 오랫동안 꺼내보지 않았던 편린들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듣던 LP판. 축음기를 버리며, 추억도 버린 날. 이제는 들을 방도 없는 소리들까지.
열차가 정차하기 위해 속력을 늦추자, 늘어진 시간과 의식이 제자리를 찾았다. 등을 맞댄 승객이 일어나는 바람에 둔탁한 진동이 내 등줄기를 타고 올라온다. 열차 문이 열리자 비에 젖은 돌 냄새가 덜컥 들어왔다. 거기에는 런던의 반듯한 대리석 냄새가 아닌, 정원의 누런 흙냄새가 났다. 문득 나는 지도 상에서 찾을 수 없는 곳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런던과 옥스퍼드 사이 '어딘가'에 있음을 짐작할 뿐이고, 지금의 나는 속절없는 회한이나, 여타 의식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 순간 철저히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빗줄기에 의식마저 눅눅하던 차에, 열차는 검은 터널을 연달아 통과했다. 내 동공은 빛과 상(像)을 놓치지 않기 위해 바짝 조였다 풀었다를 반복했다. 또다시 사라질지 모르는 것들을 쫓고 있었다. 무기력하고도 불연속적인 감각과 기억을 화폭에 담기 위해 창가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마침내 높다란 대영제국과 나지막한 건물 사이의 가파른 낙차에서 멀어지자, 가없이 완만한 초록 들판이 깔려있었다. 산도 하나 없이 휑하며, 지평선 끝까지 내 시야가 닿았다. '킬로미터'나 '마일'이라는 용어로 정확히 측정할 필요는 없었다. 도리어 내 시선을 담기에 번잡한 것들이었다. 나와 지평선의 떨어진 거리는, 내 마음만이 측정할 수 있는 길이였다. 그곳에는 구름과 햇빛 그리고 대지가 한 점에 맞닿아있었다. 나는 오늘 태초의 시작점을 본 것이다.
태초에는 분명 소리도 없었을 것이다. 열차가 선로를 변경할 때 이음새와 부딪치는 소리를 제외하곤, 하나 둘 소리가 사라졌다. 주위의 승객들은 책을 읽거나 각자 전자기기에 몰두하고 있었으며, 그 마저도 모호해졌다. 마지막 터널을 통과하고 나오자 이를 모를 호수가 제법 넓게 펼쳐져 있다. 얇은 물안개만 감싼 채 수줍어 보이기까지 했다. 열차가 런던과 한뼘 더 멀어지자 시간은 다시 늘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잊혀진 기억들이 LP판처럼 무한히 재생된다.
본 글은 2016년 1월의 여행기로, 발행일과는 시간과 계절 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열차에선 Birdy - Wings 라는 곡을 반복해서 들었습니다
* 하기와 본 글의 접점은 없지만, 관련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