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진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것들로 채운 글
유년기의 어느 봄, 남향으로 난 창을 활짝 열었다. 햇살은 기다렸다는 듯, 관음증 환자처럼 집안을 비스듬히 들여다본다. 샛노랗게 희뜩이는 눈빛은, 거실 바닥에 네모난 도화지를 만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환하고 따스한 도화지. 나는 그 위에 손가락 그림자로 강아지나 토끼를 그려 보았다. 강아지가 컹컹- 하고 짖자, 움츠린 토끼가 놀라 달아난다. 그 광경을 본 어린 동생은, 젖병을 물고 배시시 웃는다. 이번엔 도화지 아래쪽에서 희미하지만 새싹처럼 꼬물거리는 태동을 느꼈다. 아지랑이가 고사리처럼 둥근 원을 그리면서 피어오르더니, 공간을 야금야금 갉아먹는다. 빛과 상상만으로 다채로운 '봄의 수채화'를 그려냈다.
감탄하며 뒤로 물러나다가, 무심코 뒤꿈치로 전축을 찼다. 그러자 유리 문이 뱀처럼 슬며시 열린다. 때마침 달려오던 한 줄기의 빛이 유리 귀퉁이에 머리를 박곤, 그대로 쓰러졌다. 그리고 낭자(狼藉) 하게 흩어진 유혈은 무지개가 되었다. 나는 봄이 흘리는 피에, 또 한번 경탄했다. 존재라는 단어의 존재조차 모르던 시절이었다. 어린 나는, 빛에도 생명의 맥박과 그림자가 있음을 깨달았다.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면 오후 10시가 되었다. 고3이라는 말은 지질학자와 동의어임에 틀림없었다. 매일 15시간씩, 퇴적층처럼 층층이 쌓인 참고서를 한 겹씩 덜어내는 것은 고행이었다. 흙먼지처럼 텁텁한 책 속에서 가치 있는 화석을 발견하기도 했지만, 썩 낭만적이진 않았다. 담임 선생님이 힘내자는 말씀과 함께 간단히 종례를 마쳤다. 좌식 생활 탓에 직립보행을 잊은 것인지, 아니면 참고서를 머리에 가득 짊어진 탓인지, 몇몇은 고개를 바로 가누질 못한다. 친구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묵은 체취인지 이산화탄소인지 모를 톡 쏘는 공기도 뒤따라 하교했다. 그들의 엉덩이가 채 남아있는 교실에 동이, 나영, 우미, 그리고 나만 남았다. 우리 넷은 영어 듣기를 조금 더 하곤 했지만, 이는 명목에 불과했다. 흥미 없는 것은 빨리 매듭짓고, 조금 허락된 시간 동안 밀린 수다를 떨거나, 운동장에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하며 뛰어다니곤 했다. 그러곤 매운 닭꼬치를 먹고 헤어지는 게 짧은 일탈의 마지막이었다.
그날도 싸늘해진 아지랑이가 소복하게 깔린 교정을 거닐었다. 구령대를 중심으로 양옆 단풍나무엔, 아기 손 같은 잎이 자라나고 있었다. 연둣빛의 여린 손은 은빛 가로등을 조심스레 쓰다듬는다. 흡사 천장에 달린 모빌을 잡으려는 것처럼. 모두가 짝을 찾는 계절, 나무들도 이성을 유혹하는 춤을 추는 중인지 모른다. 몸을 연신 털어내며 그윽한 호르몬을 이성에게 뿌리고 있었다. 그들이 소슬한 바람결에 실어 날리는 추파에, 우리는 한껏 취한 것처럼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끝내는 서로의 웃음소리가 웃기다는 이유로. 누군가 이 광경을 봤다면 '공부가 아이들을 미치게 했다'며 가엽게 여겼을 터이다.
채 꺼지지 않은 교실의 불빛은, 우리 앞에 한가득 쏟아져 내렸다. 잔잔한 은하수가 소나기로 홀변(忽變) 하여 떨어진 것처럼, 보도블록 위엔 하얗고 네모난 웅덩이가 군데군데 고여있었다. 우리는 빛의 웅덩이를 털벅대며 뛰어다녔다. 그러자 바닥에 나뒹구는 벚꽃 잎이, 수산 시장의 생선 비늘처럼 풀썩인다. 얼마나 시간을 보냈을까. 허용된 시간은 꽃잎의 생애처럼 짧고 또 달콤했다. 친구들과 집이 반대 방향인 나는 먼저 헤어졌다. 그러나 몇 걸음을 채 가지 못하고, 아쉬움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아득히 멀어지고 있지만, 길게 늘어난 그림자는 제자리걸음으로 운동장을 서성인다. 셋의 웃음소리도 아스라이 들려온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서로를 아끼는 마음이 떠나지 않는 밤이었다.
4월엔 쉬이 빠지지 않는 과일 물처럼, 청춘(靑春)이 연상된다. 같은 계절, 일본에서 유학 중이었고 기회가 닿아 「한·일 문화교류회」 에서 친목을 도모했다. 그들과는 사적으로도 여러 번 어울렸고, 메일을 주고받곤 하였다. 이방인의 귀는 외국어로 된 대화의 골자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다. 따라서 빼곡한 문장 속 불필요한 수식어를 깎거나 덜어냈는데, '꿈'이라는 알맹이가 종종 남곤 했다. 타국의 청춘도 불안하기는 매한가지구나 싶었다. 그러고 보면 그들의 유행가에는 '꿈을 안고서'라는 가사가 많이 나온다. 나는 꿈이 유행처럼 시들해버릴까 봐, 내밀하게 감춰둔 탓일까. 그 음절을 발음할 때면, 웅숭깊이 퍼지는 파동과, 뭉클한 보라색이 여진처럼 뒤를 따랐다. 파란색도 자색도 아닌 것이 빛의 농담(濃淡)에 따라 미묘하게 변하고, '꿈'의 섬세함을 닮은 까닭일지 모른다.
얼마 후, 세미나 시간. '꿈'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유도부 학생들은 현재 하는 운동에 매진할 뜻을 밝혔고, 음악이나, 가업을 잇겠다는 친구도 있었다.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한국에 돌아가, 무역을 공부할 것이라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모 대학에 편입할 계획이며,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 소상히 나열했다. 끝내는 일본어와 무역을 접목한 일을 할 것이라고 했다. 교수님과 일본 친구들은, '세밀한 그림'에 박수를 보내 주었다. 실은 '그림'을 완성하기 위한 밑바탕을 이미 그리고 있었다. 보통은 일본 친구들과 어울리거나, 과제, 혹은 녹음한 강의를 반복 청취하는 등의 시간을 보냈지만, 저녁에 틈틈이 영어 공부를 하고 있었다.
태양도 마지막 기력을 쥐어짜던 무렵,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했다. 그리곤 이듬해 본격적으로 편입 공부를 했다. 여린 새싹이던 나에겐 혼미로, 또는 환란(患亂)의 밤이 영속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헐벗은 뒤에 비로소 겸비(謙卑)를 깨닫는 겨울을 지나, 초목이 살찌우는 봄이 되었다. 포부로 밝힌 해당 대학은 아니지만, 모 대학의 국제통상학과로 편입하였다. 세미나 교수님께 해당 사실을 전해드렸다. 내 꿈에 한 발짝 다가섰다고. 시간이 조금 더 지났다. 그날의 그림처럼, 일본어와 영어, 그리고 무역을 활용한 일을 수행하게 되었다. 현재는 새로운 꿈을 좇고 있지만, 나는 분명히 보랏빛 꿈을 안아 본 것이다.
글과 함께한 음악♪ (음악가-곡)
* Ennio Morricone - La Califfa (The Lady Caliph)
* 하기와 본 글의 접점은 없지만, 관련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