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3.1
답장은 천천히 해도 된다고, 오래오래 주고받을 편지라 급할 것 없다고. 편지의 마지막을 여러 번 읽었어요. 넓은 마롱님 마음을 더듬어 보며 모른 척 기대버렸네요. 입춘立春 앞두고 보내주신 편지에는 눈 소식이 가득했고요. 마지막 눈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 사이 눈은 또, 선물처럼 내려주었어요. 인생은 참 알 수 없는 거라고, 펑펑 내리는 눈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알 수 없으니 또 이렇게 살아가는 거구나,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생각을요. 오미크론 확진자 수가 믿을 수 없을 만큼 치솟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웃고 울고 또, 사랑하는 것처럼요.
‘절기節氣 물속깊이’라 불러주셔서 웃었습니다. 귀엽고, 기뻐서요.
지난 일 년 동안 한 달에 두 번, 계절 하나에 여섯 번 있는 절기에 맞춰 글을 썼습니다. 처음부터 그럴 작정도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죠. 시작은 작년 우수雨水였지 싶어요. 리스본 매일 글쓰기클럽을 시작한 지 서너 달 지나고 글감 주머니가 바닥을 드러낼 즈음이었지요. 절기는 언제부턴가 좋아하고 있었어요. 계절의 길목마다 마중하는 기분이 마음에 들었거든요. 정신없이 살다가도 곡우穀雨나 망종亡種 같은 단어를 들으면 걸음을 멈추고 어디쯤 와 있나 돌아볼 수 있어 좋았답니다. 그래서 주절주절 쓰기 시작했어요. 청명淸明에 날씨가 좋으니 농사가 잘될 거라고, 며칠 뒤면 입하立夏니까 여름도 머지않았다고, 서리가 내리는 상강霜降 밤에는 마음이 한없이 멀리 간다고. 대개는 즐겁게 가끔은 꾸역꾸역, 어찌어찌 스물네 번의 절기마다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스물네 개의 마침표들을 다시 읽었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거기 제가 있었어요. 대체 뭘 하며 살았나, 왜 이리 구멍투성이인가, 저는 늘 스스로가 성에 차지 않았거든요. 놀랍게도 글 속의 저는 곳곳의 허방 곁에서 매일 무언가를 하고 있었습니다. 한 번이라도 하늘을 보려, 달라진 바람결을 놓치지 않으려, 어떻게든 자주 웃으려 그렇게 애쓰고 있었어요. 무엇보다, 보름에 한 번은 꼭 글을 쓰면서요. 그런 제가 썩 마음에 든다고, 이제야 고백합니다. 이쯤 되니 절기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해야겠네요. 장난스레 시작했던 일이 큰 버팀목이 되어주었으니까요.
여기까지 쓰고 산책을 다녀왔습니다. 간밤에 내린 비로 거리는 촉촉했어요. 물기 많은 바람이 봄이 왔음을 넌지시 알려 주네요. 어느새, 삼 월. 늘어가는 확진자 수도, 전쟁 뉴스도 무엇 하나 현실 같지 않은 요즘인데 계절은 어김이 없습니다. 그것이 참, 다행입니다. 돌아오는 길엔 약국에 들렀어요. 해열제와 몸살 감기약이 든 상비약 꾸러미를 사느라고요. 1인 가구 세대주는 언제 있을지 모를 격리를 이렇게 준비합니다. 이런 준비를 해야만 하는 날들이지만 그래도 봄, 봄은 왔어요. 경칩驚蟄이 코앞이니까요. 부디 이 봄, 우리 모두 무탈하기를. 바라고 또 바랍니다.
2022년 봄의 시작, 물속깊이 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