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든 학교 생활에 적응해 가며 나름 생존방식(?)을 터득한 나는 2학년이 되면서 새로운 일들도 겪었다.
1학년일 때와는 전혀 다른 아이들과 항상 친절하게 웃어주시던 담임선생님. 전혀 상반된 분위기에 다시 또 적응을 하려니 꽤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매 해마다 힘들었다)
2학년 때는 별 다른 일은 딱히 없었고 첫사랑이 생긴 것과 그녀가 2학기에 전학을 갔다는 두 가지 일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지금처럼 잘 웃는 사람에게 호감을 느꼈었다. 나의 진짜 얼굴이든 가짜 가면을 쓰던 항상 웃어주는 사람이 좋았다.
또 한 번의 사계절이 지나고 3학년이 되자 여러 가지 일들이 롤러코스터처럼 급상승, 급하강 하며 나를 내리꽂았다.
그중에 하나는 엄마와 작은 외삼촌이 트럭에 조리기구와 식자재를 싣고서 ‘반여농산물’ 앞에 자리를 잡아 장사를 시작하셨던 것이다. 그때 했던 장사가 지금의 ‘푸드트럭’의 시초가 아닐까 싶다.
메뉴는 컵라면과 국수 종류들이었고 날이 더우면 콩국수와 팥빙수도 개시해서 팔았다. 소문이 났는지 날이 갈수록 손님들이 자주 찾아오는 건 물론이고 농산물 시장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찾아와 배달은 안 하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작은 외삼촌은 스쿠터를 어떻게 구해와서 배달을 시작했다. 모처럼 엄마의 얼굴에는 웃음이 차는 날들이 자주자주 생겼다. 나는 그런 엄마의 모습이 좋았고 행복했다.
내가 학교에 안 가는 날이나 집에 있는 날은 항상 나를 데리고 가 주셨다.
거기서 혼자 놀다가 배가 고프면 무얼 먹고 싶으냐고 물으셨고 나는 그때그때마다 먹고 싶은 음식을 얘기했다. 그리곤 야외 테이블에 앉아 맛있게 그 음식을 먹었다. 거기서 또 행복을 느꼈다.
장사가 끝이 나면 차를 타고 집에서 10분 정도 걸리는 곳에 주차를 했다. 그날도 어김없이 저녁에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렸는데 어디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야! 너 왜 거기 있어? 너도 여기 살아?”
같은 반 여자 아이가 창문을 열고 깨랑깨랑한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우리가 주차하는 곳 근처에 중국집이 하나 있었는데 알고 보니 여자 아이의 아버지가 장사를 하는 곳이었다. 중국집 2층은 가족들의 방으로 쓰는 것 같았다.
“아니! 우리는 다른 곳에서 장사하고 주차하려고 온 건데.”
“아! 그렇구나. 그래 안녕.”
어두운 밤하늘 아래 달빛에 비친 그 아이의 얼굴이 빛이 나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그 아이 집 앞에 있고 걔는 2층 건물에 창문을 열어 나를 쳐다보고 있다.
마치 주말명화에서 본 ‘로미오와 줄리엣’이 떠올랐다. 나는 그날 결국 사랑에 빠졌다. 행복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매일매일이 이랬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 행복은 1년이 채 되지 않았다. 행복 뒤에 숨어 있던 ‘비극’이 얼굴이 드러내고야 말았다.
엄마와 작은 외삼촌은 더 이상 장사를 하지 않으셨다. 내가 계속 장사를 하면 안 되냐고 물어도 보고 때를 써 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작은 외삼촌은 끝내 입을 열어 하시는 말씀이
“그게 다… 사정이 있어서 그래. 그러니까 더 이상 때 쓰지 말아라.”
장사를 접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엄마는 한숨을 쉬는 날이 점점 늘어났다.
그 한숨이 주는 분위기는 날이 갈수록 무거워졌고 나는 무서웠다.
그러던 어느 날. 어른들끼리 하는 얘기를 통해 장사를 접어야 했던 진짜 ‘이유‘를 듣게 되었다.
엄마는 ‘위암‘ 이셨다.
https://youtu.be/5iSlfF8TQ9k?si=3X4eSn-gnPRJi1Nu